함께 먹는 일은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한집에 사는 이를 식구(食口)라 부르고, 한편이 되는 일을 한솥밥을 먹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솥밥은 저절로 지어지지 않는다. 공동체의 허락과 금기에 따라 누군가는 장을 보고 상을 차리고 치운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같은 일을 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이 일은 노동력을 날마다 재생산하지만, 대개 임금 없이 여성에게 맡겨져 왔다.
재생산 노동은 이제 국경을 넘어 이동한다.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은 지금 글로벌 사우스에서 노동과 돌봄과 혼인을 들여오는 준-제국의 자리에 서 있다. 2018년 구민자가 양평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출신의 결혼 이주 여성 루시 사피트리는 짜장면에 돼지고기가 든 줄 모르고 먹었다. 그에게 한국 음식을 배우라는 요구에는 그가 그 집의 밥을 짓게 되리라는 기대가 함께 들어 있다. 가족을 먹이는 노동은 그의 몫이 되지만, 식탁의 규칙을 정하는 권한은 그에게 없다.
《Middle Ground》는 이 비대칭을 뒤집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미 사라진 금기까지 데리고 한 상에 앉는다면 무엇을 함께 먹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이 질문은 공통분모를 찾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포함시키기 위해 무엇을 제거해야 하는지의 문제다. 전시는 조화로운 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동시에 적용해 보는 실험에 가깝다. 쐐기풀 수프에서 돼지고기를 빼고, 육수와 버터를 갈라놓고, 사찰 음식이 피하는 마늘과 파를, 자이나교가 금하는 뿌리채소를 덜어 낸다. 재료의 목록이 줄어드는 동안에는 조건들이 서로 양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끝에서 부딪히는 것은 시간이다. 자이나교의 수행자는 해가 진 뒤 먹지 않고, 라마단의 무슬림은 해가 떠 있는 동안 먹지 않는다. 하나의 요리로 두 규칙을 동시에 만족시킬 방법은 없다. 작가는 조건을 다시 적고, 그 수정은 또 다른 충돌을 낳는다.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의 경계를 역사에서 반복해서 다시 그은 힘은 여럿이었고, 궁핍은 그중 가장 절박한 것이였다. 1800년 오리노코에서 독일의 자연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강이 범람으로 고기잡이가 끊긴 두세 달 동안 점토 덩어리를 구워 삼키는 지역의 선주민 오토막 사람들을 기록했다. 1945년 1월, 헝거 윈터의 네덜란드에서 배급 체계가 무너지자 정부는 튤립 구근 수프 조리법을 배포했다. 1959년에서 1961년 사이 중국에서는 관음토(觀音土)라 불리는 흰 흙이 굶주린 이들의 배를 채웠고, 아이티에서는 오늘도 점토를 개어 햇볕에 말린 머드 쿠키가 팔린다.
전시장에 놓인 위와 식도, 뇌, 부처의 발가락을 닮은 그릇들은 가장 강력한 금기인 식인을 가리킨다. 그 금기조차 절대적이지 않았다. 1934년의 한 신문은 병든 아버지에게 제 다리 살을 베어 먹인 자식을 전하며 미신을 통탄하면서도 그 효성을 칭송했고, 2012년에는 사산된 태아를 가루로 만든 캡슐이 국내로 반입되다 적발되었다. 돌봄의 요구가 극단에 이르면 돌보는 이가 자신의 몸을 바치기도 했고, 인간의 몸은 약재가 되어 상품으로 거래되기도 한다.
〈먹을 수 있다는 말〉에서 작가의 어머니는 ‘허용된다’, ‘일정량 이하에서는 안전하다’ 같은 문장을 행주에 수놓았다. 자식의 옷과 가방에 소속을 표시하고 이름을 새기던 손이 허용의 문장을 한 땀씩 새겼다. 드로잉 연작 〈몸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들〉에는 산모가 오리고기를 먹으면 아기의 손발이 붙고 자라고기를 먹으면 목이 짧은 아이를 낳는다는 속설들이 인체 형상 위에 적혀있다. 공동체가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통로인 임신한 여성의 몸은 음식의 규칙이 가장 촘촘히 새겨지는 자리였다.
전시는 이 실험의 절차를 부엌의 기물로 세운다. 봉을 둘러 나선형으로 오르는 체 〈걸러진 질서〉는 거르고 골라내는 손의 일을, 생명에 서열을 매기던 ‘자연의 사다리’의 형상과 겹친다. 높이가 다른 유리 상판이 계란판과 믹싱볼, 건조망 위에서 포개지는 〈겹쳐 놓은 조건들〉은 바닥과 벽, 테이블 높이를 넘나드는 3차원 구조로 확장된다. 귀 모양의 도자 깔때기 〈귀로 배운 입〉은 조리에 쓸 물을 실제로 거른다. 교집합은 모두를 위한 자리이면서 누군가에게는 오염의 자리다.
오늘 그 경계를 다시 긋는 것은 시장이다. 성분표를 여러 금기 규정에 하나씩 통과시키는 〈원재료명 아래〉와 계절이 갈리지 않는 마트의 신선식품을 사계로 나눈 사진 〈진열된 사계〉는, 표를 해독해 장을 보는 일이 재생산 노동의 일부임을 보여 준다. 전시장 세 곳에 나뉘어 놓인 3채널 영상 〈먹는 것으로부터〉에서 사람들은 신념과 감각의 변화, 이주로 낯선 음식 체계를 접하고자기 문화를 다시 바라보게 된 경험을 이야기한다.
전시는 완성된 결과로 제시되지 않는다. 〈식사가 계속되는 동안〉은 준비와 실행, 잔여의 상태를 순환하며, 매끈하게 차려진 상 대신 그 상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을 드러낸다. 매주 토요일 〈함께 먹기까지〉에서는 바라카 작은도서관에서 밀키트를 만들어 온 아말과 살마, 이태원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맥스, 셰프 이혜승이 각자의 규칙으로 상을 차린다. 한국의 부엌에서 자기 규칙을 지워야 했던 이들이 이제 식탁의 질서를 제안한다. ‘우리는 먹음을 통해 우리가 속할 세계를 만든다’는 작가의 말대로, 《Middle Ground》는 매일 다른 상이 차려지는 실험의 자리가 된다.
글: 양지윤,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