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Soldier: Yong Baek Lee Solo Exhibition
Yong Baek Lee
2005/12/23 – 2006/02/14

天使-戰士: 이용백 개인전

오프닝: 2005년 12월 23일(금) 오후 6시
작가: 이용백
장소: 대안공간 루프

Angel-Soldier: Yong Baek Lee Solo Exhibition

Opening: Dec 23th 6:00pm(Fri), 2005
Artist: Yong Baek Lee
Venue: Alternative Space LOOP

天使-戰士

이용백: 전복적 힘으로서의 가상성에 대한 탐구
국내 미술계에 한정해 볼 때 작가 이용백이 ‘첨단 디지털 매체와 예술을 접목’이라는 실험에 있어 가장 선두에 서 온 작가 중 하나라는 점에 이견이 있기 힘들다. 물론 ‘미디어아트’ 즉 매체예술은 이미 국내에서도 미술계의 주된 흐름이 된지 오래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제작과 전시의 기술적 측면에서 용이한 ‘싱글채널 비디오 작업’과, 이것에 약간의 변형을 가한 정도의 형식이 위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영상작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호작용, 음향예술, 키네틱, 심지어 로보틱스 기술에 이르기까지 최근 매체예술의 가장 첨단적이고 까다로운 영역들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이용백의 작업은 그 시도의 모험성만 가지고도 충분히 주목의 대상이 될 만하다고 생각된다. 단 이용백의 경우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단지 그러한 외적인 측면 즉 ‘첨단매체예술’이라는 이국적 측면을 통해서만 흥미를 가져왔고, 정작 그의 작업내용이나 예술적 의미, 동시대 미술과의 상호연관의 맥락 등에 대해서는 숙고해 볼 기회를 별로 갖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이용백의 과거의 몇몇 주요 작업들을 다시 소급하여 논하면서 그의 작업이 놓여있는 전체적 지평을 간략히 조망해 보려 할 것이며, 바로 그러한 조망 속에서 이번 ‘대안공간 루프’에서의 작업들 역시 선명히 이해되리라 생각된다.

90년도 초반 이후 현재까지 이용백의 작업은 전체적으로 작품의 내용이 다양하고 심지어 잡다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는데, 내가 보기에 이러한 면은 작가로서의 활동초기부터 한 두가지 인기있는 시리즈로 스스로를 협소하게 한정시키고 그럼으로써 진부한 매너리즘에 빠지기보다는, 폭넓고 충분한 실험을 통해 작업의 폭과 깊이를 자연스럽게 확보하려는 작가의 장기적 선택에 기인한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번 대안공간 루프 개인전에서의 작품구성을 보면 작가가 그러한 다양한 실험들을 좀 더 압축된 한 두가지의 관심사를 향해 모아가려는 의도가 분명히 읽혀지고 있다. 우선 90년대부터 2004년도까지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다양함 가운데에서도 의외로 이들 전체를 포괄할 법한 중대한 주제어 하나가 떠오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이질성, 불경(不敬), 재현과 상징에 대한 공격, 탈중심화된 정체성” 등과 같이 오늘날 디지털매체문화의 생태에 밀접히 연관된 특징들로서 이용백은 이들을 형식적 측면에서는 ‘공감각'(synesthesia)이나 환각적 입체영상 같이 최근 해외의 첨단매체예술들이 탐구해 나가고 있는 면모들과 결합시켜 독특하게 가시화 해내고 있다.

그에 해당하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2002년 《미디어시티 서울》전에 전시되었던 〈Abnormal-비정상〉이란 작품은 몰핑(morphing)의 기법을 통해 디지털예술의 가장 중요한 면모인 ‘액체성’과 ‘가역성'(可逆性), ‘변형성’을 부각시킨 작품이다. 그 작품은 부처의 도상이 예수의 도상으로, 다시 예수가 부처로 끊임없이 변형되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은 괴기스러운 변신의 몸부림과 효과음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모든 변형과정은 사실 그 도상들이 지니는 상징적 궤도로부터 일탈을 시도하는 불경스런 의도로 가득 차 있으며, 나아가 그러한 불경스런 변신을 죽음을 충동과 자해의 쾌락, 무아적 황홀경의 상황으로 보여주고 있다. 상징적, 문화적 경계를 위반하는 이러한 거역적 운동은 사실 몰핑과 합성기술이 지배하는 인터넷 사이버공간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이고 생태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차용, 합성되어 제3의 변종으로 ‘전락’하는 과정 말이다. 사이버공간에서 순수함과 지역적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각적 기호는 변형을 겪게 되고, 고착된 상징적 질서로부터 분리되며,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디지털 문화의 문화생태적 특성을 암시한다. 이러한 특성은 달리 표현하면 ‘이질적 세계들의 혼성적 공존’과 같은 것이며, 이는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가 이미 80년대 포스트모던 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제시한 ‘이교도주의’ 혹은 ‘이단성'(paganism)의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오래 전에 초현실주의 이론가이며 이단적 사상가인 조르유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타자의 침범과 공격에 의해 “자기적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것”, “하나의 단일한 형태(form)로 정의될 수 없는 것”, “잡다성에 의해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들을 성스러움과 비천한 세계가 상호 조우(遭遇)하는 순간으로 보면서 이를 비정형(l’informe)이라는 ‘반 미학적’, ‘반 형식주의적’ 함의를 지닌 표현으로 총괄하였는데, 이 역시 이용백의 작업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라 생각된다.

그 다음으로 〈Twins in Monitor-모니터 속의 쌍둥이들〉(2001년작)라는 작품을 보자. 이 작품들은 앞서 언급한 비정상성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와 기본적으로 연관된 주제에 입각한 작품으로서, ‘돌연변이’와 ‘자기 정체성, 자기이마고(imago)의 분열’을 마치 마술적 환각을 보는 듯한 입체영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 영상은 마치 태반 속에서 꺼낸 듯한 몸이 붙은 돌연변이 쌍둥이의 모습으로서, 이것은 실은 반투과 유리 밑에 감추어진 채 작은 레일 위에서 전후 왕복운동을 하는 모니터로부터 나오는 영상이며, 이로부터 마치 환각을 보는 듯한 입체 영상이 연출된다. 가두어진 암흑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부유하는 이 쌍둥이의 영상은 손에 잡힐 듯 허공에 떠 있는 그 비현실적인 느낌을 통해서 보는 이에게 일종의 퇴행적 환상처럼 다가오며, 그 괴기스런 분열적 신체는 ‘하나의 순수한 나’라는 우리의 주체개념에 대해 교란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신체의 이미지를 분열, 다중화시킴으로서 ‘탈중심화된 주체’라는 포스트모던적 주제를 탐구하는 작업은 이미 매체예술의 발생 초기부터 여러 작가들에 의해 탐구된 바 있는 다양한 작업들의 계보에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예를 들어 피터 캠퍼스(Peter Campus)나 댄 그래함(Dan Graham)등의 작가들이 비디오 매체를 일종의 ‘거울복제’로 간주하고, 카메라의 교묘한 위치설정이나 시간지연 등의 방법을 통해, 복제된 자기이미지의 분열이나 주체와의 동일시가 실패하는 과정을 부각시킨 것은 그 고전적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매체테크놀로지가 혼성적, 분열적, 다중적 존재론이라고 하는 일종의 ‘후기인간적'(Posthuman) 영역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고 있음을 여러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관심사가 색다른 형식으로 표현된 또 다른 사례로서 〈Tactile documentary-촉각적 다큐멘터리〉(1999년작)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레일 위를 수평으로 왕복하는 LCD모니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한 게이 동성애자의 벌거벗은 몸을 보여주는 작업인데, 일단 그 소재 상에 있어서도 ‘양성적 몸’이라는 불순한 상태, 성적 질서의 와해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맥락에서는 앞서 언급한 작품 〈Abnormal〉과 동일한 관심사 위에 놓여져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러한 주제론적 측면만이 아니다. 이 작품은 그 신체를 극도의 클로즈업을 통해 마치 ‘눈으로 천천히 애무하듯이’, 대상과의 거리가 소멸된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그 ‘불경스런’ 대상은 ‘나’의 완고한 관념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힘을 행사하고, 또 바로 이점 때문에 그것은 일종의 ‘공포감’, 과잉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용백의 작품 대다수에 대한 총체적이고 빠짐 없는 고려는 아닐지라도 이와 같이 몇몇 기존 작품사례들에 대한 고려를 통해, 우리는 이용백이 이질성, 혼성성, 분열적 주체 등 디지털문화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쟁점들을 적절히 집어내며 이를 작업주제로 탐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이번 대안공간 루프 개인전에서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러한 기존의 주제 위에 “가상시뮬레이션 시대의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과 ‘실재'(The Real)의 개념”이라는 인접한 주제가 새로이 부가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작업들 중에서 그러한 면모를 잘 드러내는 작업으로서는 〈Angel-Soldier, 천사-전사〉 (2005년작), 〈Window in Window - 창 속의 창〉(2005년작) 같은 작품들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비디오 영사와 오브제 설치 등 다양한 혼합적 요소들로 구성된 작업으로, 이들은 큰 주제 하에 같이 포섭되는 하나의 작품으로도, 또는 여러 개의 분리된 작품들로도 볼 수 있다.

우선 《Angel-Soldier》의 경우 그 상황설정이 매우 독특하다. 공간은 다른 사물은 일체 없이 오직 화려한 인조 꽃들로만 채워져 있는 인공적 공간이며, 이는 오직 모조물(시뮬라크르)로만 순수하게 구성된 극단적 시뮬레이션의 세계를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 인조꽃 무늬로 완벽히 위장하고 총을 든 채 살금살금 전진하는 군인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되고 놀라게 된다. 이러한 상황설정을 통해서 이 시뮬레이션 공간은 주체의 필사적 생존이 걸려 있는 극한적 전쟁터와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그 인조 꽃들은 일종의 강한 유혹의 힘을 행사하는 시뮬라크르이며, 군인은 그 환경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개체가 아닌, 그 시뮬레이션 환경의 일부로 변환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종의 ‘위장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인데, 이는 보호색과 같은 ‘위장’ 또는 ‘의태'(mimicry)를 행하는 곤충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확대해석한 로제 카이유아(Roger Caillois)의 이론을 빌어 고려해 봄으로써 매우 시사적 함의를 발견해 낼 수있다. 로제 까이유아는 곤충의 위장이 ‘개체가 능동적으로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개체가 외부의 강한 자극에 대한 굴복, 즉 일종의 피동적 과정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는 곤충의 입장에서는 ‘자아의 실체성의 상실’과 같은 것으로서, 생물의 주체성은 ‘탈-소유화'(De-possesion)되게 되고 외부공간의 강한 외부적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곤충과 인간이 같은 본성을 공유한다는 관점 하에 일종의 ‘의식의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을 지향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여러가지 다른 학술적 개념들로 변형되어 최근의 많은 사이버문화이론에서 표현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이버스페이스, 가상공간과 같은 새로운 환경이 창출해내는 ‘액체적 자아'(Arthur Kroker)라는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 시뮬레이션의 기표들이 주체의 내부로 침투하여 주체의 자아를 변형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가장 중요한 의제로 설정한다. 단 작품 《Angel-Soldier》에서 놓쳐서는 안될 점은, 그 안의 군인은 동시에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분리되어 행동하려는 시도를 하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리하자면, 그 군인은 ‘시뮬레이션된 기표들 혹은 가상공간의 단편적 경험들로 치환되어 버린 인간’ 대(對) ‘그로부터 독립된 주체의 가능성을 찾아나가는 존재’라고 하는 두개의 상반된 존재론 사이를 오가는 이중적 존재를 의미하며, 이는 오늘날 사이버공간에 특유한 인간존재론에 대한 포괄적이고 함축적인 스케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에서 내게는 이 작품이 이번 개인전의 전체적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이 작품에 연속된 또 하나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군복’ 오브제 설치작업은 디지털매체시대의 예술가와 창조의 개념에 대해 명쾌한 발언을 하고 있다. 이는 《Angel-Soldier》 비디오에서 활용된 꽃무늬 위장군복과 헬멧 등의 실물을 나열한 설치인데, 각각의 군복에는 높은 계급인 장성 계급장과 함께, “Windows”, “Quicktime”, “Word”, “Explorer” 등의 로고들이, 그리고 명찰에는 보이스, 피카소, 뒤샹, 백남준, 다빈치 등 미술사의 중요한 대가들의 이름이 기입되어 있다. 이 작품은 인조 꽃무늬, 전투복, 디지털 문화의 주요한 상징, 예술적 창조의 상징 등 4가지 요소들을 교차시키는 방법을 통해 시뮬레이션 시대에 새롭게 변모한 예술적 창조의 개념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예술이 가상공간 속에서의 무수한 복제와 편집, 변형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가변적이고 전략적인 산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암시이다. 예술의 진정한 생존과 위상 자체가 모호해지고, 예술가는 ‘기원적 창조’가 아닌 ‘복제물의 차용과 재구성’이라는 시뮬레이션 형식을 빌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역설적 존재, ‘창조-이후'(Postcreation)의 존재로 나타난다.

현실공간이 곧 가상현실적 기술에 의해 시뮬레이션 된 기표들로 대체된다는 점, 그리고 로제 카이유아의 이론으로부터의 유추를 통해 보았듯이 독립된 주체가 이제 ‘주체-테크놀로지’라는 혼성적, 이종적(異種的) 상태로 변환된다는 점, 바로 이들이 소위 흔히 말하는 “실제와 가상의 뒤섞임, 혹은 양자간의 경계가 모호해짐”이라는 명제의 구체적 의미인 것이다. 이용백은 이번 전시에 그러한 경계의 모호성 혹은 상호중첩이란 면을 좀더 명쾌히 드러내려는 작업을 제시하고 있다. 〈Window in Window〉(2005년작)라는 작업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이러한 모습이 단지 데이터로 작성된 가상적 이미지임을 느껴지도록 청색 화면과 컴퓨터 명령어들이 아이들의 모습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 ‘아이들’ 앞에는 ‘시체’의 영상을 담은 LCD모니터가 반복적인 왕복운동을 하고 있으며,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죽었다, 죽었다”라고 외친다. 여기서 우선 중시할 점은 관객에 의해 바라 보여지는 가상적 영역과 이를 바라보는 관객주체의 입장이 전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아이들의 영상은 극장의 스크린처럼 관객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만 집중되는 대상이 아니라, 영상 자체가 창문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가상공간의 아이들이 거꾸로 관객의 바라보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다음과 같은 두가지 질문을 이끌어 낸다. 첫째, 아이들을 바라봄으로써 역으로 아이들에 의해 바라보여지는 식의 ‘시선의 상호중첩’ 혹은 ‘상호반사’. 혹은 시선의 상호교차배어법적(chiasmatic) 중첩이라고 하는 현상학적 질문, 두번째 질문으로서, 창문을 세계를 향한 시선의 통로로 가정하고, 가상공간으로부터 우리를 역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을 통해 현재 관객이 점유하고 있는 실제세계의 실제성을 문제삼는다고 하는 존재론적 질문, 이러한 두가지 질문들을 〈Window in Window〉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아이들의 영상 앞에 놓여진 시체의 영상은 그러한 시선과 실재의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추가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치는 앞서 인용한 이용백의 기존작품인 〈Tactile documentary〉와 거의 동일한 하드웨어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아이들의 영상’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요소이지만, 그 자체로도 별도의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별도의 작업으로 간주될 만한 가치가 있는 작업이다. 여기서 LCD모니터를 통해 스캐닝 하듯이 보여지는 대상이 비닐로 포장되어 방부처리된 음습한 시체라는 점이 중요하다. 아이들과 이 시체 사이에는 일종의 ‘부정의 부정’이라는 역설이 존재한다. 어차피 아이들과 시체, 양자 모두 실제적으로는 부재하는 가상적 존재들이며 ‘실재의 부재’일 뿐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이미 부재하는 시체’에 대해 부여하는 “죽었다”라는 확언적(constative) 판단은 사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역설에 불과할 뿐이며, 그 말은 결국 한 유기체의 죽음 뿐만 아니라, ‘실재의 죽음’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이 시체의 영상을 독립된 작업으로 간주하여 읽을 경우는, 이 역시 게이동성애자의 몸처럼 일종의 금지된 것과의 대면이라는 위반적 미학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죽음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죽음의 충동은 이용백의 작업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이용백은 레일 위에서의 ‘반복적 스캐닝’이라는 방식을 통해 시체에 극도로 가까이 근접하고, 시체와 촉각적으로 교류하는 듯한 극한적 하이퍼리얼리티를 보여준다. 사실 그것은 시선이 아니라 일종의 착시이고 스펙타클의 과잉과 같은 경험이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전체의 상실’이라는 면이다. 관객은 시체의 전체적 모습을 볼 수 없다. 단지 레일 위 모니터의 반복적 운동을 통해 상상적으로 전체를 재구성할 뿐이다. 오직 부분의 확대, 집적, 반복을 통해서만 전체가 추정될 뿐이다. 결국 ‘시체의 실재’는 단지 ‘파편들의 연속적 연결’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독특한 상황이 연출된다. 전체를 통합적으로 인지하게 해주는 형태 혹은 서사는 부재하며, 반대로 깨어진 서사적 단편, 상실된 기표의 파편들, ‘전체적이고 객관적인 실재의 부재’가 이 작품의 지배적 정조가 된다. 따라서 여기서 죽음이란 주제는 이중적 함의를 지닌다. 하나는 ‘불경스러운 것, 비사회적인 것, 공포스럽고 더러운 것과의 피할수 없는 대면’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에 대한 믿음이 실제를 대체한 하이퍼리얼한 기표에 의해 위협받는 상황에서의 주체의 인식론적 무력함’이라는 보드리야르적 주제이다.

이용백의 작업에 있어 ‘첨단 매체 테크놀로지의 활용’은 단지 외적인 면모이며 수단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첨단매체미술의 하드웨어적 측면에 현혹되기 이전에, 그것이 미학적인 면에서 수반하는 혁신적이고 근원적인 차이를 이미 경험적으로 터득하고 이를 농축된 주제로 좁혀서 탐구해 온 작가이다. 그의 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을 몇가지 압축해내자면, 지배적 상징질서로부터 축출된 존재들, 금기, 불경스러운 것, 이질적 타자의 영역과의 대화이며, 이용백은 이를 이미지들간의 혼성, 영상과 관객주체와의 혼성, 감각들의 혼성(공감각) 등 다양한 방식을 빌어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날 첨단매체 예술이 열어나가는 포괄적 지평을 함께 읽어내게 된다. 그것은 바로, ‘가상성'(The Virtual)이란 것이 이 실제세계의 인식론적 질서에 개입하는 ‘불순하고 전복적인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통찰,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기본적으로 반-휴머니즘적, 이종적, 혼성적, 반-미학적인 새로운 문화의 지평으로 인도해 가리라는 통찰이다.

김원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