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현재와 역사-6‧10민주항쟁에 대한 30주년의 기억
이 글은 예술과 역사 그리고 6‧10민주항쟁에 대한 일반화의 오류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최민화의 그림에 대한 진술이 이 글의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글은 최민화가 6‧10민주항쟁 20주년을 맞이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기획했던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에 한정하여 서술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기억하는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장을 견지하는 글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그날”은 최민화의 그림에서 다루고 있는 ‘그려져서 기억되고 있는 그날’이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최민화의 그림이 한창 분홍으로 세상을 덮고 있을 때, 민주항쟁의 수많은 날 중 “그날”을 불러내던 시절의 그림들로 지금 우리가 6‧10민주항쟁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가 분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 이유에 대해 아직 충분히 해명된 바 없지만, 언뜻 얕은 지식으로 말해 보자면, 분홍은 “색色”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분홍은 빨강과 하양 그 사이 중 어느 정도에 자리를 잡는다. 분홍이 색이 아니라는 단정은 우스꽝스러운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분홍의 진정성은 어느 정도에 걸쳐 있다는 것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빨강은 어느 정도에서 그 빨강의 빨강다움을 잃는다. 하양은 아예 색이 아니며, 그저 밝음의 순도 높은 정도를 말한다. 하지만 하양 또한 어느 정도에서는 이미 하양이 아니지 않은가. 그저 분홍만이 어느 정도에서 제 위치를 가진다. 그러한 시절을 화가는 화가의 눈으로 그냥 알아버렸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시절을 ‘어느 정도에서 적당하게’드러난 세상으로 보았던 모양이다. 최소한 우리가 그의 작품과 이번 전시를 통해 만나야 하는 6‧10은 최민화의 이런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그날”을 기억하자고 말한다.
그의 그림은 세 가지 형식적 특징을 가지면서 비로소 그의 그림이 된다. 하나는 빠른 필치다. 그는 붓을 그리는 도구로 확실하게 사용한다. 붓을 이용해 물감을 떠 붙이는 방식과 이점에서 그의 붓질이 구별 된다. 그의 붓질은 빠르다. 결국 그가 그리고자 하는 형태는 단순한 모양을 화면 안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가능해진다. 그가 굳이 빠르게 그리고자 하는 이유는, 비록 유사한 밑그림과 스케치가 이미 많이 준비되어 있음에도, 모양새를 옮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 있는 형상(形象)을 놓치지 않기 위함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니 감상자로서 우리는 그림 한 장에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모양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형상이란 사실 여기에 없고 저기에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여기에 없다는 것은 현상적으로 우리에게 드러나 있어 시각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확실하게 알려준다. 가령 “민주화의 열망”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민주”, “평화”, “사랑” 등은 눈에 보일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화가는 그것을 결단코 그리려 하는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최민화의 그림은 그런 회화사 전체에 맞서 있다. 그런 마주 서 있음은 화가에게 회화사의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두 번째 특징은 그가 단색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단일한 그림의 분위기를 색으로 조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런 그림의 색조에 상이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나는 모노-톤mono-ton이라는 외래어를 빌려 단색이 갖는 색감의 차이들로 구성된 색면으로 회화를 바라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최민화의 그림은 이런 관점으로 어떤 것도 해명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단색조의 이해 방식은 적절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다른 하나의 해석방식은 분위기를 굳이 하나의 색감으로 연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일이다. 분위기란 어떤 것을 대상으로 부르면서 그 대상과 마주하고 있는 부른 이, 즉 대상을 대상화한 사람과 대상이 되어버린 ‘그것’의 사이의 관계 전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할 때 드러나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다고 하여 이 분위기를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긴다면 우리는 대상을 대상화 할 수조차 없다. 최민화는 앞서 이야기한 바처럼 가장 치열했던 민주항쟁의 시대를 분홍-그저 어느 정도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색色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색色은 세상만물의 실존함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분홍색을 풀어보자면 치열한 삶으로 버티고, 악과 마주 싸운 그 시대를 폄하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를 떠 올린 것은 아니다.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은 물상物狀이 그의 눈에 결코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악은 바로 제 자리를 이탈해 있으면서, 남의 자리를 힘으로 강제하거나 강탈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연의 섭리인 양 까불어 제끼던 인간적 무례無禮였다. 그런 무례는 세상을 뒤죽박죽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쳐 온통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있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대강 그저 그렇게 있는 거야 하면서 아무런 일도 아닌 듯 살아간다. 그게 악이고 화를 내게 한다. 그렇게 화가는 한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회화적 형식이 갖는 세 번째 특징은 순간瞬間으로 사태를 바꾸어 보여 주는 최민화식 시점해석에서 갖추어진다. 그의 그림을 설핏 보면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는 것처럼 인상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가진 공력은 이야기를 압축하여 일상화된 삶의 한 순간처럼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그림 안에는 모순을 드러내고 사건이 겹쳐져 있으며 일탈적 상상이 스쳐 지나가는 세세함이 가득하여 결코 사진술이 보여줄 수 없는 회화적 공간을 완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그의 그림이 가지는 형식 때문에 자칫 그림 안에서 만화적 공간을 볼 수도 있다. 그의 상상력이 압축하고 있는 사건들의 중첩성 때문에 그의 그림에서는 상반된 이야기의 플롯이 엉킨 듯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조작操作은 회화를 회화답게 만들 수 있는 기술적 성취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결코 시대의 이야기를 조작造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이 역사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회화는 철저하게 회화로서 회화다움을 간직하기 위해 모든 회화의 기술들이 망라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중에 그의 시간에 대한 해석이 가장 돋보이는 회화술로 볼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 이유는 바로 시점해석時點解釋에서 찾을 수 있다. 대개 역사적 사건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 경우 그 이야기를 중요하게 작품으로 해석한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역사에 대한 예술적 행위의 정당성으로 간주한다. 사실을 사실로서 기억하게 옮기는 작업의 태도를 우리는 이런 전통적 역사화의 이해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다큐멘타리 관점에서 직접적 현장성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사진, 영상술의 발달에 따라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 개입하는 회화의 자리는 위태롭게 되었다. 그런데 최민화는 이를 시점해석의 방식으로 풀어간다. 물론 그는 이런 비판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시점해석이란 최민화의 그림을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글쓴이가 만들어 낸 조어造語다. 이 용어로써 최민화의 그림을 해석하는데 있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그의 그림을 우리가 어떻게 역사화로 정립하여 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함께 다룬다. 우선 시점해석이란 말로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대개 역사적 사실, 또는 사실 관계에 매달릴 때, 놓치는 것이 바로 시간에 대한 자기 해석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요즈음 우리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영어단어를 즐겨 쓰는데 “Fact”를 체크check하고 싶어 한다. (어쭙잖은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은 이 낱말을 금과옥조로 여기기도 한다.) 지나간 시간에서 결코 나에게 같은 질質로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시간에 대한 지금, 여기의 해석일 수밖에 없는 사태 전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먼저 말해야 한다. 우리는 사실을 사실로서 알 수 없는 어떤 한계를 시간 안에서 먼저 확인할 할 수밖에 없는 하찮은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적 상상력이다. 예술은 기만을 성취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래서 상상력의 힘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그것을 근본으로 삼아 시간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최민화의 그림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해석하면서 그림으로 그려 밖으로 내 보여주는 그의 역사이해라 할 수 있다. 그림에서는 그 시대 흔한 거리 풍광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인과관계나 기승전결의 스토리 라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간을 지금, 여기(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바로 그 지금과 여기)에서 화자話者이자 관찰자인 그림 그리는 이로서 최민화가 자신의 시간에 따라 해석된 내용을 담아내려고 한다.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사실관계를 따져 물어 훼손이 가장 적은 상태의 기록을 내려 받아 정리-보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기록”이라고 한다. 진술함에 있어 가능한 참된 진술을 바탕으로 남기려 하는 태도가 ‘기록으로서 역사’를 간직하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요청되면서 더 중요한 것은 ‘그것과 관계를 맺음으로 있는 지금 나의 삶’으로서 역사가 있다. 이런 역사는 늘 “지금”마다 각자의 삶에서부터만 해명될 수 있다. 최민화는 1987년의 그 6‧10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렇게 읽어야 할 역사로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