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권 다수의 나라는 유럽의 식민 지배와 독립투쟁, 일본의 침략,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대립, 군부 독재에 의한 통치, 민주주의 제도의 혼란 속에서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는 점에서 유사한 근현대사적 노정을 걸었다. 국민통합이라는 과제를 떠안고 있던 이들에게도 체제의 안정화와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 ‘민족주의’ 드라이브였고 탈식민 시대 이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마르코스), 싱가포르(리콴유와 인민행동당), 말레이시아(집권 여당 암노) 등 신생 독립국들은 전체주의 또는 군사 정권 등 권위주의적 체제를 통해 내치의 안정과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발전국가’를 지향하였다. 체제 수립의 정당화, 현재의 번영과 안정, 미래에 대한 청사진, 지도자의 영웅화, 정책 및 성과 홍보, 개인보다 집단/국가의 우위 등 아시아 지역에서 생산된 체제 친화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밀도’가 높은 재현 이미지들이 오늘날에도 유통되고 있는 점은 아시아의 역동적 현실을 감안하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력의 작동기제로서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거부할 수 없다면 가시적인 규율과 통제로서만 권력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권력의 비가시적 본질에 대해서도 꿰뚫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아시아 지역의 특수한 정치문화적 지형에서의 지배 권력이 프로파간다로서 대중을 보다 용이하게 포섭하기 위해 어떠한 표준화된 프레임과 시각적 재현 방식들을 동원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지배 체제가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고, 대중을 어떻게 설득하며 그들의 열망과 동의에 어떻게 부응하는지 그 보편적 통치 메커니즘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통치를 상상하는 방식이나 그 틀이 되는 통치문법, 권력 작용과 구조를 현재와의 상관성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그 지점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의 뒤틀린 작동방식이나 억압의 징후, 모순들에 대한 이의 제기와 성찰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주지하다시피 동서를 막론하고(물론 아시아권에서의 근대적 통치 테크놀로지는 서구의 영향을 받았다)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 미디어에 대한 장악과 관장은 제국주의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배 세력이 대중의 동의를 얻기 위해 선취하는 작업이다. 알튀세르적Louis Althusser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에 해당되는 대중매체는 군대나 경찰과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RSA) 못지않게 이데올로기적으로 국가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단지, 미시적이며 개인적 가치로 보여 덜 비판적으로 수용될 뿐이다.
영화는 특히, 대중에게 관념적, 추상적 사상이나 전망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가시화함으로써 시각적 알리바이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상당한 파급력까지 가지고 있어 나치 선전영화는 물론이고 동시대에도 전략적으로 이용되는 사례들이 무수히 많다. 관제영화, 뉴스영화, 문화영화, 계몽영화 등으로 불리던 특정 방향성을 담은 영상물들은 대상을 확장시키고 일상 속에서 보다 친근하고 유용한 장르로 자리매김하며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애니메이션은 성인에서 아동까지 포괄적으로 체제에 순응하도록 의식계몽을 하거나 사상이나 정책을 쉽고 효과적으로 각인시키기에 손색없는 대중매체였다. 이는 보다 치밀해지고 진화된 심리전에 가까우며 여기서 시각이미지는 짧은 시간 안에 강렬한 메시지를 주입시키는 탁월한 선전 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통치 메커니즘은 감각적으로 침윤될 때 더욱 강력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지점과 상응하는 이데올로기적 작용은 군사 퍼레이드, 매스게임, 군가, 건전가요, 뮤직비디오, 웅변대회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력은 대중의 오락과 놀이에도 개입함으로써 ‘권력의 재현’을 감각적이면서 정서적인 방식으로 내밀하게 유포, 각인시킬 만큼 매체의 속성을 잘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뚜렷한 정치적 지향성을 드러내지 않더라고 대중의 입으로, 귀로, 몸으로 체득하게 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개인의 사고, 일상적 활동, 정체성, 몸짓 등에 관여하는 또 다른 관제시스템으로서 권력에 복속된다. 굳이 거시적이거나 강압적인 장치가 아니더라도 치밀하고 지속적인 방식을 통해 사회 구석구석을 순환하며 작동하는 미시권력이자 생명관리권력bio-power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권력관계는 이렇듯 몸에 각인되면서 안정적으로 지속되며 궁극적으로 의심 없는 믿음을 구조화한다. 이것이 바로 부르디외가 말한 오인misrecognition이며 이것으로 지배 권력을 대변하고 옹호하기 위한 현실의 왜곡과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을 양산할 수 있다. 공기처럼 항상 우리를 둘러싸고 일상에 관여하고 있지만 크게 의식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했던 모든 사회적 실천의 원리, 근본이 되는 질서체계와 문화, 지배관계는 항상 정당하고 옳은 것인가? 권력 관계 속 이데올로기적 작용 안에서 시각예술은 어떠한 실천을 할 수 있는가? 절대적인 믿음에 가해진 균열 사이에서 새어나온 물음들은 이번 전시에 참여한 미디어 작품들이 온전히 끌어안고 있는 문제들이다. 항구적인 통치체제를 마련하기 위해 규정한 질서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길들이는 표준화와 규격화에 대항하는 실천의 모색으로서 통치성의 구조와 작동 원리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것의 균열을 제안한다던지, 개인의 삶을 침범하는 이데올로기와 대의의 불합리성과 폭력성 등 권력이 은폐하고자 하는 모순과 허위의식의 두꺼운 겹을 들춰본다던지, 이데올로기적 재현방식을 재해석, 재가공하여 희석되거나 변곡되는 지점에서 촉발되는 의미작용을 탐색하는 등 작품들은 위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푸코가 말하는 ‘주체화’ 즉, 권력을 자기 안에 내면화하는 ‘예속화’의 수동적 실천을 거부하고 통치원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저항적 인식과 자기변형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과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대항적 상상을 모색하는 것이리라. 이를 통한 예술적 실천은 어쩌면 지배질서와 연결되어 비판적 판단을 마비시켰던 조작과 기만, 허위와 거짓 환상의 고리를 끊어내고 사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통찰하고 재조정하게 하는, 규범화되지 않은 질서 바깥으로 통하는 열쇠가 돼 줄지 모른다.
글: 이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