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Joo Lee Solo Exhibition: Shangri-La
-Opening: July 31st 6:00pm(Tue), 2018
-Artist Talk: Aug 11th 4:00pm(Sat), 2018 / With Hyosil Yang
-Organized by: Alternative Space LOOP
-Sponsored by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Young Joo Lee Solo Exhibition: Shangri-La
-Opening: July 31st 6:00pm(Tue), 2018
-Artist Talk: Aug 11th 4:00pm(Sat), 2018 / With Hyosil Yang
-Organized by: Alternative Space LOOP
-Sponsored by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이영주 개인전: 샹그릴라
-오프닝: 2018년 07월 31일(화) 오후6시
-작가와의 대화: 2018년 08월 11일(토) 오후 4시 / 대담: 양효실
-주최/주관: 대안공간 루프
-후원: 서울문화재단
This exhibition of Young Joo Lee’s recent work takes its inspiration from the fictional Shangri-La described in the novel Lost Horizon by James Hilton, which depicts life in a harmonious place free from chaos and death. Shangri-La is depicted as a mystical, imagined paradise. In contrast, Lee likens Shangri-La to an Asian woman as seen through the Western male gaze. Lee’s focus is on the stereotype and fiction present in the way Asian women are viewed.
While studying in Germany, Lee used to wait tables at a sushi bar. The Asian owner of the restaurant designed the interior of the restaurant to resemble a show window, and required the waitresses to wear kimonos. Song from Sushi satirizes the stereotypical European male customer as he gorges on food served to him by Asian women. On the rotating conveyor belt of the sushi bar, Lee sings and dances in a strange, disturbing manner.
Lee puts her body front and center in her work, making active use of it. She criticizes the unreflective and widespread acceptance of the imagined fantasy of Asian Women, employing a pop and somewhat old-fashioned aesthetic in an approach that is humorous yet grotesque, and that take the form of moving and still animations and muffled sounds and noise.
이영주 개인전은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 등장하는 ‹샹그릴라›에서 출발한다. 소설 속 샹그릴라 사람들은 혼돈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하고 이상적인 파라다이스의 삶을 다룬다. 인류의 이상향으로 제시된 샹그릴라는 히말라야 어딘가 깊숙이 자리 잡은 완전하고 평화로운 신비의 장소, 가상의 낙원으로 제시된다.
이영주는 샹그릴라에 관한 서사를 제 몸의 서사로 재창조한다. 소설이 아시아라는 가상화된 대상에 관한 서사라면, 이영주의 애니메이션은 신비롭다고 여겨졌던 대상이 바라본 서사다. ‹샹그릴라›에서 소개하는 모든 애니메이션에는 작가 자신이 등장한다. 복제된 그녀의 몸은 가족 구성원으로, 군부대 구성원으로, 컨베이어 벨트 위를 도는 스시로 재현된다. 그녀는 노래하고, 구호를 외치며, 춤을 춘다. 서양에 거주하는 아시아 여성 이민자라는 가상적 존재, 동서양의 문화 접촉 안에서 발생하는 오해들은 작가의 몸을 통해 가시화된다.
애니메이션에서 주된 배경을 이루는 것은 ‘꿈 속’이다. 이는 신화 속 서사 구조와 상징 언어에서 출발한다. 인물의 감정 표현 방식은 그리스 고대 연극에서 사용되는 가면과 후렴구의 방식을 차용했다. 이영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인간의 내면적 상이다. 현실 세계에서도 타인이 갖는 정체성은 제 인식 안에서 형성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어느 집단이 함께 상상한 샹그릴라라는 상징 체계 안에 무시되었던 소수자의 시선을 드러낸다.
‹수치스러운 파랑›은 작가의 꿈에 기반한 내용으로 동양인 여성이 파란 눈을 가진 딸을 낳게 되면서 겪게 되는 가족과의 갈등과 심리상태를 서사시로 만든 작업이다. ‹검은 눈›은 작가가 인도에 체류하는 동안 본 북한의 수소폭탄 뉴스, 미국이 비키니 섬에서 실행한 수소폭탄 실험(1946-1958), 그리고 인도에서 접한 신화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를 배경으로 현실과 공상의 세계를 그린 28미터 길이의 대형 두루마리 드로잉이다.
3채널 애니메이션 설치 작품 ‹제한된 낙원›은 2016년 여름, 한 달에 걸쳐 DMZ의 민간인통제선을 따라 여행하며 기록한 자료들과 한국호랑이에 대해 조사한 내용에 기반한다. 3채널의 오른쪽과 왼쪽 영상 화면들은 각각 국경을 마주한 남과 북을 상징하고, 가운데 화면은 미지의 공간,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두 군 부대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발생하는 분쟁, 반대 쪽에 대한 편견과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스시우먼의 노래›는 작가가 직접 작사, 작곡, 제작한 뮤직비디오다. 학창시절을 보낸 독일에서 이영주는 스시바의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한국인 오너는 식당을 쇼윈도로 설계하고 웨이트리스가 기모노를 입을 것을 요구했다. 뮤직비디오는 아시아 여성이 서빙하는 음식을 섭취하는 유럽의 남성 손님이라는 전형성을 희화화한다. 이영주는 스시바의 컨베이어벨 위를 돌며 기이하게 노래하고 춤을 춘다.
한국과 독일, 미국에서 성장한 이영주는 경험한 사회,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바탕으로 국가와 가족이 개인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질문한다. 한 개인이 겪는 생물학적, 역사적, 사회적, 인종적 차이는 작업에서 꿈과 신화의 서사적 구조로 풀이된다.
글: 이선미
당신들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나를 …
한국, 독일을 거쳐 현재 미국에서 활동 중인 젊은 작가 이영주의 국내 첫 번째 개인전은 우선 수채화, 두루마리 목탄화, ‘조각’, 영상,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기법과 매체를 구사하는 그녀의 실험적인 호기심이나 열정을 드러낸다. 그녀가 다룬 소재는 동아시아 여성 상투형과 직결된 독일에서의 경험, 한국의 DMZ를 방문했던 일, 자신이 꾼 자각몽(lucid dream)처럼 사적인 것과 역사적·정치적인 것을 아우른다. 그녀의 말대로 “개인적 서사를 통해 좀 더 큰 서사와의 연결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경험과 구조, 개인과 집단의 교차점을 건드리려고 한다. 이영주는 작은 종이를 이어 붙여 제작한 두루마리에 목탄화를 그리던 와중에 인도에서의 체류 중 우연히 발견한 10미터 길이의 두루마리 종이 덕분에 수 십 미터에 달하는 목탄화, 줄곧 그녀의 애니메이션 작업의 배경화면으로 기능하는 목탄화의 형식적 특성을 성취한다. 연상적이면서 몽환적이고 서정적이면서 기괴한 배경을 이영주의 분신들, 그녀의 얼굴-가면을 한 인형들이 관절을 삐걱대며 모호한 서사를 따라 걷는다. 이영주의 인물들은 장면에 종속된 인물들, 즉 상황에 맞추진 채 어떤 의미나 의도를 발견해내는 인물들이 아니다. 이영주의 무대의 배역들은 완만히 수평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화면 위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그렇기에 이해가능한 서사를 거스르면서, 정체성의 서사에서 삐져나와, 행위자도 모르는 힘에 밀려 ‘앞’으로 가고 있는 이영주의 분신들, 대역들이다. 따라서 관객을 위시한 보는 자들에게 이영주의 화면은 비선형적이고, 탈중심적이다. 어떤 일이건 일어나는 꿈 장면이나 설화나 민담처럼 다른 계열의 전형들, 형상들이 병렬, 공존할 수 있게 되는데, 현실적, 상징적 논리를 거부하는 인형-인간들, 이영주의 얼굴-가면을 쓴 인물들의 이야기는 서사를 압도하는 이미지, 현실이 작동해도 사라지지 않는 유령들, 언제나 얼굴과 구분 불가능한 가면들의 잔존, 잔재라는 점에서 ‘가치’를 보유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해를 도모하는 영상에서 이미지는 기능적이지만, 불가해한 모호성을 도모하는 영상에서라면 이미지는 그 표피성으로서 존립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냉전의 도식과 서사가 엄존한 DMZ를 방문한 이영주는 그곳에서 지금은 사라진 한국 야생호랑이를 추적하는 남성-어른을 만나거나, 보초를 서는 군인들에게서 민담이나 설화에 등장하는 이상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국가주의는 바깥에서 온 사람에게는 이미 그 자체 신화이고 환상이다. 가장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서사가 작동하는 공간에서 이영주는 오래된 이야기들, 그러므로 인식론적 단절에도 불구하고 연속되는 설화적 이야기들의 동시성, 혹은 역설적 공존을 발견한다. 호랑이가 실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나 귀신이나 이상한 동물의 소리를 보고 들었다고 믿는 군인들은 가장 낡은 근대 정치가 작동하는 장소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보유하고 증언하는 괴이한 존재들이다. 이영주는 자신이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모두 자신의 얼굴로 분장한 남쪽과 북쪽 군인들의 상징적이고 정형화된 이미지와 결합한다. DMZ라는 역사의 산물이면서 역사에서 이탈한 장소에 대한 작가의 재서술이다. <제한된 구역>의 3채널 화면의 좌우에는 로르샤흐의 대칭 얼룩처럼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군인들이 배치되고, 중앙 화면에는 근대를 가로지르는 전근대적 환상들에 잠식당한 비무장지대의 ‘삶’이 배치되었다. 근대의 남성성은 이영주가 구성한 여성적 공간인바 비무장지대의 안개, 연기, 카오스에 결국 잠식된다. 이영주는 남성들이 군복을 벗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정치적 현실을 유도해 들임으로써 남성성이라는 문화적 기호를 여성적 장소에서 함입해 버린다(incorporate). 젠더를 수행적인 것으로 재고하는 이영주는 가시적 기표로서의 남성성을 비가시적 ‘실재’로서의 여성적 형상―탈형태론적이고 비유기적인(deformed and inorganic)―으로 대체함으로써 수십 년의 시간 속에서 DMZ가 ‘회복한’ 반인간적이고 초현실적인 특성을 여성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또 서구 남성이 제3세계 여성에게 투사한 여성 이미지를 소재로 한 <스시 우먼의 노래>는 다름 아닌 그 상투적 이미지에 동원되었던 작가 자신의 일상적 경험에 대한 재서술이다. 회전초밥이 스시 컨베이어벨트 위를 오가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작가는 얇게 저며진 생선의 살점과 상투적 이미지로 납작해져야 했던 자신을 동일시한 영상, 가라오케나 노래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서구와 비서구 사이에서 작동하는 문화적 위계서열을 동아시아 출신 여성은 아시아 여성의 상투적 이미지와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경험하기 마련이다. 1세계 여성보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이라는 ‘전형’은 제3세계 출신 여성에게는 동화와 거부, 긍정과 혐오 사이에서 모순적으로 작동한다. 생계를 위해 그 이미지에 맞춰야하지만 작가로서 그 이미지는 ‘처리’해야 하는 환영이다. “이국적인 먼 나라에서 온” 것으로 욕망된 여성, 따라서 ‘진짜’ 여성은 아닌 ‘나’는 사실 “바다 건너에서 온 여성”, 평범하면서 독특한 한 사람, 이영주이지만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그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곳은 초밥을 파는 이국적인 가게였다. 영상 속 스크립트는 급기야 회쳐지기 전의 물고기로서의 “우리” 모두의 동질성을 노래하는 희극적인 장면으로 전환되고, 플라스틱 그릇에 올려진 짜부라진 초밥 같았던 작가는 ‘괴랄한’ 몸동작에 신이 난 여자 아이들로 바뀌어 있다. 서구 남성의 환상에 동원된 환영적 이미지를 희극적으로 반복하는 작가의 ‘역습’은 어떤 이미지도 입지 않은 몸, 밋밋한 가슴과 괴랄한 얼굴 표정과 신체를 감춘 바디슈트가 조성한 기이한 이미지로서의 몸에 의해 작동하게 된다. 즉 그녀는 상투형으로서의 이미지에 진짜 몸으로 대항하지 않으며, 어떤 기존의 이미지에도 환원되지 않을 이미지로 자신을 연출해냄으로써 남성들을 위한 이미지를 자신의 이미지로 반격한다. 이영주는 대담한, 아름다운, 진지한, 진짜 자신을 증명하는 대신에 자기희화화, 혹은 자기 이미지화에 열중한다. 그녀는 여전히 대상이지만, 이제는 자신이 ‘발명한’ 이미지를 입어버림으로써 어떤 시선에 의한 포획도 불가능하게 한다. 시선의 주체인 남성의 자리를 붕괴시키는 이런 전략, 즉 자기희화화는 자기애 혹은 자긍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전복적이다. 싸구려 이미지를 이기는 것은 진정한 이미지가 아니라 더 싸구려인 이미지이다. 그래서 <스시 우먼의 노래>는 오리엔탈리즘을 되받아치는 데서 팝의 전복성, 유머를 차용한다. 환상은 무해한 수동적 대상과의 거리에 의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어떤 대상 이미지기표로 환원되지 않는 이 거칠고 조잡하고 역동적인 형상에서 우리는 나르시시즘의 대상에 투사된 상상계적 자아의 공격성, 혹은 혐오에 ‘반응’하지 않는 대상의 ‘힘’을 일별하게 되는 것이다.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이미지화에 대한 저항은 긍정적 실체화가 아니라 희극적 자기-이미지화라는 역설이다.
작가 자신이 꾼 자각몽(lucid dream)을 기술한 <수치스러운 파랑>은 거의 모든 것들이 아무런 논리나 근거 없이 일어나는, 그러나 자각몽이기에 작가 자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꿈 장면이다. 간호사로 파견되어 독일 남자와 결혼한 한국계 독일 여성들에게 들었던 이야기, 확률상 백인 남자와의 연애나 결혼 가능성이 더 높은 상황에서 “혼혈”을 낳는 것에 대한 불안이나 그로 인해 벌어질 자신의 삶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그런 꿈을 꾸게 한 것 같다고 작가는 말한다. 꿈을 꾸는 나와 꿈 속의 나, 즉 서사를 구성하고 통제하는 나와 서사의 배역이면서 보는 나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나 사이에서 꾸어지는 자각몽은 논리와 욕망, 불안과 리비도가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모순적 장면이다. 소원성취와 욕망의 환유적 운동이 동시적으로 작동하기에 자각몽은 읽히면서도 읽히기를 피해나간다. 작가의 내레이션이 ‘설명’해주듯이 “미스터리와 논리는 같은 것을 두 개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린 어느 날 미스터리의 방문을 받았고 나는 논리를 잃었습니다.” 주체의 의식적 통제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 욕망이 주도하는 곳, 자각몽과 같은 꿈 장면이다. 꿈에서 우리는 황당무계하게도 “먼 나라로 날아서 걷고”, 그렇기에 일어난 모든 일들, 오직 이미지로서만 일어나는 이 불가능한 세계가 상징적 세계에서 훼손된 우리의 욕망, 가능성을 보존한다. 이미지는 실체보다 열등한 것이지만, 그 열등함은 우리를 실체로의 환원과는 다른 쪽으로, 좀 더 모호하고 혼종적이고 불가해한 쪽으로 이끌 수도 있다. 이영주는 전통적인 기법인바 목탄화와 민담 혹은 설화를 팝적인 이미지들, 가상 실재를 살아가는 이미지들과 접합시키고, 가장 낡고 오래된 형식을 가장 새로운 가능성과 접합시킨다. 아마도 이것은 그녀가 ‘그들’이 제3세계 여성 작가에게 투사한 작업의 ‘새로움’이나 차이를 증명해야 하는 일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미 하고 있는, 해왔던 것들은 지금 그곳에 있는 그녀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당분간은 떠돌이로, 그러나 그들이 투사하고 욕망하는 이미지와 갈등하면서, 그 이미지를 해체적으로 인용하면서, ‘대안적’ 이미지를 추적하면서 여기와 저기를 오가는 혼종적 상태를 살아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전에 아무런 의도나 구도 없이 즉흥적으로 손에 쥔 초콜릿과 정면에 설치된 카메라를 놓고 진행된 퍼포먼스인 <초콜릿 먹는 방법>은 지금까지 다룬 작업들에서 반복된바 이영주의 얼굴-가면이 ‘없는’, 이영주의 맨 얼굴이 ‘노출’된 영상이다. 퍼포먼스의 기록이 아닌 카메라와 대치 상태에서 벌어진 퍼포먼스이다. 즉 작가의 통제가 부재하는 상황이다. 포장지에 적힌 것, 찍혀 있는 트럼프의 얼굴-이미지에 대한 설명 뒤에 작가는 초콜릿을 먹는 ‘자신의’ 방법을 실행한다. 이영주는 초콜릿으로 만든 총 ‘조각’인 <구호물자>에 대해 “폭력의 위장”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쓰면서 단 초콜릿으로 만든 총은 남성들의 국가주의나 제국주의의 이중성이나 양가성에 대한 팝적 전유, 혹은 팝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초콜릿 먹는 방법>에서 이영주는 초콜릿을 껍질 채 먹는다. 그들이 건네준 초콜릿을 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게 당연한 상투적 프레임을 찢는 그녀의 즉흥적인 방식이(었)다. 폭력은 늘 달콤한 물건/대상을 동반한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 채, 그러므로 그 달콤한 물건을 달콤함의 기호 없이 먹는 이 충격적인 방식은 카메라 뒤의 우리, 카메라와 동일시되는 보는 우리를 압도한다. 우적우적 물건을 씹는 얼굴의 비틀리고 기괴한 표정에 우리는 포획당한다. 저 여자는 종국에는 토할 것이라는, 음식을 초과하는 물질에 기겁한 식도와 위장의 거부감/혐오작용이 작동할 것이라는 불안이나 기시감도 거부한 채로 작가는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벌어진 일을 충실히 이행해낸다. 이영주의 밋밋한 얼굴이나 몸, 정신이 나간 사람의 껍데기 같은 표정을 지었던 작가의 몸은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시체, 실체, 본질로서의 몸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초식 동물의 육식성이나 만만한 여성의 공격성이나 인간의 짐승성 같은 역설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먹어치우는 이영주를 경유해서 이쪽으로 밀려든다. 그들이 준 것을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반복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들의 욕망의 구조 안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반복하는 것, 그것이 기성의 여성 이미지를 반복하면서 찢고 있을 작가 이영주의 씩씩하고 유머러스한 전략이다.
글: 양효실, 미학자
이영주
이영주는 1987년생으로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 미술학교에서 영상과 마이스터 슐러를, 그 이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 예일 대학교 조소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MINE, Ochi Projects, 로스앤젤레스, 2018>와 <생존자들, Basis Project Room, 프랑크푸르트, 독일, 2014> 등의 개인전을 개최했고 <오토세이브, 커먼센터, 서울, 2015>, <쿠리치바 비엔날레, 브라질, 2013> 등 주요 그룹전에 참여했다. <인도 산스크리티 재단>, <쿠리치바 비엔날레 아티스트 레지던시, Curitiba, 브라질> 등의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했고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최근 예일대학교 디지털미디어센터(CCAM)의 초청작가로 가상현실과 실감비디오설치에 대한 워크샵을 진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