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e Jin Chung Solo Exhibition
Sue Jin Chung
1999/03/06 – 1999/03/18

정수진 개인전

참여 작가: 정수진
장소: 대안공간루프
주최/주관: 대안공간 루프

Sue Jin Chung Solo Exhibition

Artist: Sue Jin Chung
Venue: Alternative Space LOOP
Organized by: Alternative Space LOOP

<양파; 넌 벗겨라, 난 깐다>

정수진. 이 작가야말로 양파다. 벗겨도벗겨도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양파들 때문만이 아니라 까뒤집어보고 헤집어봐도 쉽게 간파되지 않는 그녀의 그림들은 “양파” 같기만 하다. 질문에 열심히 대답을 해주는 듯싶은데도 알 수 없는 그녀에게선 “양파” 냄새가 난다. 어린 시절 읽었던 전래동화, 서로 잡아먹던 어떤 마을의 사람들이 ‘파’를 먹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우리엄마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내게 양파를 머리맡에 놓고 자는 민간요법을 권유했던 기억이 난다. 근데 왜 하필 ‘파’냔 말이다! 울 엄마 땜에 양파를 보면 쉽게 잠을 생각하게 되는데, 정수진 이 여자 그림들은 잠을 생각하게 하는 ‘양파적’인게 아니라 오히려 ‘깬다’. 아니 깨는 정도가 아니라 나의 신경끈을 조여 온다. 어차피 현대미술이란 게 양파적이면서 다시 양파적이지 않으니 정수진 이 여자가 내보다 한수 위일까?

서로 충돌하는 단어들만 있고 통사구조는 엉망진창인 문장 같은 이 여자 그림은 꿈이나 무의식, 아니면 상징 같은 걸 생각나게 하니까 그림의 형상들 사이를 헤엄치면서 알레고리(근데 이 여자의 형상들 간에는 고리가 없다. 고리 없는 알레고리다)들을 찾아 헤메야 하는 강박증에 시달리게 만든다. 근데도 이 여자는 자기 작품에서 ‘소통’을 깨나 중요하게 생각한단다(미쳐).
그림 속에 잉여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탓에 이 여자 그림 앞에서 우린 의미 없이 양파껍질을 까고 있을 수밖에 없다(어쩌라구).

이국적 풍물도 좋고 샤머니즘적 장면이나 색채도 좋다, 일본판화(우키요에)를 비스므리 닮은 장면도 좋은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모두 짬뽕처럼 뒤섞여서 요상한 짬뽕맛을 낸다는 것이다. 요는 그 짬뽕의 맛의 정체가 파악이 안 된다는 것일 진데 그나마 양파는 유독 이 여자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열쇠구녁은 아닐까 싶어 붙들고 늘어져봐도 답이 안 보인다. (힌트가 많으면 답을 맞추기 쉽지만, 열쇠가 많으면 자물쇠를 푸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

그래도 요즘 잘나가는 사람들 좀 끌어 들여 이 여자의 그림에 어거지로 꿰어 맞춰보도록 시도해보자(본래 전시서문의 형식에 충실하게). 정수진이 줄창 주장하는 구조니 유토피아니 하는것들을 일종의 원형질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즉, 샤머니즘적 색채와 도상들, 입방면의 틀과 마치 모태속의 수정란처럼 물과 공기에 둘러싸인 양파들을 레비-스트로스가 각기 다른 신화들의 ‘구조’로 가는 기본단위인 신화소(mytheme)로 상정하거나, 빠졸리니가 영화의 기본 단위를 영화소(cineme)로, 롤랑바르트가 내러티브의 최소 단위를 핵기능으로 상정하여 각각 영화와 내러티브의 구조를 밝혀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작가의 ‘구조’로 가는 열쇠로 봐줄 수도 있겠다.

   

위 세 명의 선생님들 중, 인간 정신의 무의식적 활동은 내용(content)에 형식(form)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던 레비-스트로스 선생님은 다양하고 표면적인 현상형태의 이면에는 이러한 표면 현상을 생성하는 구조가 있고, 심층의 구조는 비록 관찰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실재한다고 믿었다. 복잡다단한 코드들을 던져놓고 그들로부터 다시 구조로 회귀하는 듯 슬그머니 발을 빼는 작가의 그것은 좋게 봐줘서 레비-스트로스 선생님의 작전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런데 정수진 이 여자는 그의 그림이 궁극적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것이고자 한단다. 유토피아,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또 모리가 뽀개지기 시작한다. 유토피아 즉 이상향이란 미래지향적인 것이고, 파라다이스 즉 낙원이란 과거 지향적이며 둘 다 미래와 과거 사이의 ‘현재의 결핍’을 상정하고 설정된 것 정도가 내가 아는 유토피아에 대한 지식일진데 정수진의 그림으로부터 현재의 결핍 또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관한 통로를 찾을 수가 없단 말이다. 하긴 정수진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 말해 정수진과 함께 양파를 까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면 현재의 결핍이 느껴지긴 한다(혹 내 머리가 나쁜 건 아닐까 하는).

작가의 유토피아적 구조에 대한 믿음은 확고하다. 그러나 스스로 아직 양파 속 모양을 설명할 수 없는 건, 아직 작가가 껍질을 계속 벗겨 내는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벗겨도 벗겨도 속이 쉽게 드러나지도 않고, 결국 까보니 알맹이가 없을 수도 있는 것. 그것이 양파 아니겠는가) 정수진의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같이 양파 까기에 몰두해야만 한다. 그녀는 소통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잔득 쌓아 논 양파들을 눈물을 흘리며 까는 노동에 동참한 후에, 함께 그 양파를 요리해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이제 당신에게 달려있다. 노려보고, 째려보고, 거꾸로 보고, 씹어보라, 때때로 그림 안엔 그녀의 구조가 당신의 목을 조를 지라도 양파 “까기”의 즐거움은 그림 밖에 있을 지어니!

김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