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라 불리는 인조인간 로봇은 인간의 형상과 움직임, 피부와 표정을 닮은 완전한 인공생명체이다. 알려진바 대로, 13세기 독일의 신학자이자 자연과학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세계의 첫 ‘안드로이드’를 제작하기 위해 30년 간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지하세계로부터 온 천사들과 현자의 돌의 힘을 사용하여, 이 세계에 알려져 있지 않은 금속과 물질’을 창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드로이드에 ‘영혼’을 불어넣는 과정이 마무리되었을 때, 그의 제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것이 “악마의 도구이며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많은 예술작품에서, 인간이 제 모습을 닮은 안드로이드를 창조한다는 행위는 신성모독으로, 디스토피아에 다다르는 길로 묘사되었다. 인간과 인조인간이 갖는 계급적 구분과 차별은 유지되고 반복되었다. 대표적으로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조인간인 레플리칸트는 노예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인간에게 대항한다. 레플리칸트 레이첼은 안드로이드라는 존재가 갖는 인간의 공포와, 인간을 닮으려는 안드로이드와의 혼란을 상징한다.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은 완전한 주기를 상징하는 수 12를 연상시키는 인조인간 로봇 12개가 만들어내는 그림자 연극이다. 권병준은 개별 로봇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노숙자, 거리의 악사, 밤의 정령과 같은 역할을 부여한다. 극이 시작하면, 회전판 위에 고개를 숙이고 서있던 드로(노숙자)가 잠에서 깨어나 관객들을 둘러본다. 오트와 필립(거리의 악사)은 떠도는 소문을 주고받으며 장단을 맞추기 시작한다. 곧이어 드로는 회전판을 돌리며 자신의 모습을 3D 스캔하고, 이를 프로젝션 한다. 드로는 프로젝션 된 제 이미지를 바라보며 노래를 시작한다. 12개의 외팔 로봇들은 제 모습과 상대의 모습을 서로 비추며, 함께 춤추고 노래한다.
과학기술이 새로운 권력의 원천이 되는 지금, 권병준은 ‘춤추는 로봇’이라는 역설적이며 풍자적인 비평을 던진다. 그의 로봇들은 로봇 본연의 ‘높은 생산력’의 구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림자로 환원되는 빛의 시선을 따라 인간을 닮은 로봇들이 꿈틀거린다. 대칭을 벗어난 기형적 외팔이 로봇의 거칠고 투박한 움직임은 그림자의 중첩, 왜곡, 합성 등의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인간적 익숙함’이란 착시적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로봇들은 ‘효용성 없는’ 움직임들에 전념한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바라보기만을 반복하는 것이다.
‘과학 기술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예술은 그 혁신에 기여한다’는 선전은 정치인이나 기업가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에게서조차 마치 ‘보편적 문명 변화’처럼 수용된다. 창조적인 혁신가들이 이끄는 ‘4차 산업 혁명’은 도래했다고 선언들을 한다. 하지만 그 이면의 실상은 무시되고 감추어진다. 다국적 IT 기업의 독점은 시민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고, 정보 부유층과 빈곤층의 분화 형태로 드러나는 제국주의와 후기 자본주의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권병준은 12개의 로봇이 90년대 홍대 클럽신을 함께 한 동료들과 서울역 광장을 유랑하는 사람들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때 로봇은 인간에 비해 하등 한 노예의 상태가 아니다. 이는 ‘소외된 사람들’ 그 자체가 된다. 제한된 몸짓 안에서 서로를 비추며 춤추고 노래하는 로봇들을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도 소외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기를 작가는 권한다. 이는 또한 인공지능, 머신러닝, 자동화와 같은 ‘4차 산업 혁명’을 광고하는 지금, 수공업에 기반한 전통적 로우-테크를 사용하는 작가만의 예술적 대응이 된다. 2018년 루프에서 처음 소개된 권병준의 로봇 퍼포먼스는, 이번 연극에서 5인의 크리에이티브 팀과 함께 형식적 실험과 내러티브적 확장을 시도한다. 협업과 연대라는 제작의 방식 또한 거대 자본의 지원을 받는 기업형 과학 기술의 방식이 아닌, 자본의 이윤추구에 종속되지 않기 위한 독립된 개체들의 생존 방식이다.
글: 양지윤,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