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宙主, 魔氏
-Artists: U JUJU, MA C
-Venue: Alternative Space LOOP
-Organized by: Alternative Space LOOP
-Sponsored by: Arts Council Korea, Neolook
You, 宙主, 魔氏
-Artists: U JUJU, MA C
-Venue: Alternative Space LOOP
-Organized by: Alternative Space LOOP
-Sponsored by: Arts Council Korea, Neolook
You, 宙主, 魔氏
-참여 작가: 유쥬쥬, 마C
-장소: 대안공간 루프
-주최/주관: 대안공간 루프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네오룩
변辯
이 두 작가를 묶어보자는 기획은 우선 각기 독특하고 개성적인, 그러면서도 유쾌한 이들의 우연하고 자의적인 만남의 의미효과들 때문이긴 하지만, 사실 속내도 따로 있었다. 우선 서로 비슷한, 그렇지만 너무도 서로 다른 것들을 한 자리에 이접, 연접, 통접 시키고 싶었다. 늙거나 젊은, 혹은 과거와 현재를 연동시켜 더 큰 미래를 궁리해보고 싶었고 이렇게 서로 다른 세대를 묶는 허리 같은 역할이 지금 시대의 (다소 오래된) 대안공간의 어떤 소명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술사의 특정한 맥락을 짬뽕처럼 섞고 싶은 맥락도 한몫했다. 두 작가를 지칭할 수 있는, 이를테면 키치나 팝, 캠프, 하위문화와 펑크, 혹은 민중미술과 (반/비) 제도 미술, B급 문화와 민속미술, 생활미술, 취미미술, 북한적인 이미지와 포르노그라피, 섹슈얼리티와 욕망, 콜라주와 브리콜라주, 일상과 온라인상의 이미지의 채집과 수집문화, 오타쿠, 집착 등의 그 다양한 스펙타클이나 잡종스러운 양태들을 한번 뒤섞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잡동사니 같은 다양함이 오늘날의 한국 동시대 미술의 어떤 생생한 단면은 아닐까 하는 우문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거창할 수 없겠지만 한국 동시대 미술사를 새롭게, 혹은 이질적으로 써보고 싶은 야무진 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작업들을 지금, 여기 대안공간 루프에서 색다르게 펼쳐보고 싶었던 것이다. 특정한 지향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숱한 방향성하에 다채로운 시도들을 꾀하고자 하는 대안공간 특유의 문제의식을 작동시키고자 했던 것인데, 그저 새로운, 낯선 실험들만을 펼치고 전개하는 그런 대안공간이 아니라, 이제는 대안공간 역시 동시대 한국미술의 작은 역사를 다른 시각으로 맥락화 시키는 시도들 또한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한때, (변방이고 아웃사이더라는 단서를 달아야겠지만) 민중미술의 계보를 잇는 마C와 (마찬가지로 주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유별난) 신세대, 팝아트 비스무리 한 설치미술가, 아트디렉터로서 현란한 이력을 펼쳐온 유쥬쥬 작가를 홍대 앞 대안공간 루프라는 특정한 자장에 묶어놓는 이러한 시도가 동시대 한국 미술 씬(scene)에서 어떤 각별한 효과마저 자아낼, 엉뚱하고 야무진 모략쯤이길 기대해 본다. 루프(loop)라는 이름처럼, 운명처럼 돌고 돌아 긴 순환의 맥락에서 그 위상을 다시 자리매김하는 루프의 향후의 역사성 혹은 이런 식의 새롭고 이질적인 섞어놓기 식의 전시를 통해 한국 동시대 미술사를 다른 식으로 실험하고 싶은 어떤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종의 쇼케이스처럼 이번 전시가 자리 매김 되었음 하는 바람들이 그런 것들일 것이다. 어쩌면 늘 그저 그럴 것이라는 익숙하고 당연한 기대를 져 버리는 대안공간 루프의 어떤 소심한 변신을 위해 이번 전시기 기획되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동형이체同形異體, 이형동체異形同體
그렇다고 루프의 특정한 욕심을 위해서만 이번 전시가 기획된 것은 아니다. 유쥬쥬와 마C 모두 한국 동시대 미술계에서 새롭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 만큼의 충분히 독특한 작업세계를 펼치고 있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주류나 중심이 아닌, 혹은 아직은 그 가장자리(邊)라는 단서는 달아야겠지만… 그렇게 생각해보면 대안공간이야 말로 이런 변방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야 할 책무 또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 여하튼, 두 작가를 보면 성별이나 나이를 짐작케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유상종, 끼리끼리 등의 단어들은 떠올리게 한다. 별난 작업들만큼이나 더 유별난 작가적 정체성과 캐릭터도 한 몫 했겠지만 작업들 역시 시각적 스타일 면에서 유사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히,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이미지 작업을 전개하고 있고, 그 화려한 시각적 이미지의 원천을 일상과 삶 속에서 채집하고, 이를 각기 다른 스타일의 짜깁기(콜라주와 브리콜라주)를 통해 가시화시키고 있는 작가들이다. 아울러 팝과 펑크, 인디와 언더그라운드 같은 대중문화, 하위문화들과 친화성이 있고, 북한이나 섹슈얼리티와 같은 이른바 금단의 이미지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나 민속folks 친화적인 작업 스타일은 의미심장한 관심을 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세대의 문화적 관심, 상이한 작업 스타일과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견 비슷해 보이는 것이다. 이번 전시가 주목하는 지점 역시 이들 각기 다른 작가성, 작업들을 새롭게 선보이고자 하는 맥락만큼이나 이렇게 세대와 스타일을 달리한 맥락이 하나의 몸짓으로, 의미효과로 작동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에 있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이 부단히 착종되면서 기형처럼 전개되는 한국 동시대 미술의 유별난 작태들인데, 이러한 행태들에도 단순히 부정적인 모습만이 아닌, 어떤 일말의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성 또한,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이번 전시는 비롯되었다.
민,속民,俗
이번 전시의 경우, 이를 (포스트, 혹은 동시대) 민속 미술, 로컬 미술의 측면에서 방향성을 잡아보고자 한다. 글로벌만이 미덕인 시대, 어쩌면 시대역행 같은 설정일 수도 있겠지만 지역의 고유한 문화에 대한 이해 없는 글로벌 문화 역시 같은 비판을 면치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역 특유의 역사적이고 동시대적인 문화적 차이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야 말로 이 시대의 또 다른 화두일 것이다. 그래서 글로컬Glocal 한 시각이 주목받지 않나 싶다. 여기에 최근 아시아성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현안으로 부각되는 시점인 점을 감안한다면, 새로운 의미의 지역 혹은 삶과 일상 문화로서의 민속 문화는 또 다른 중요한 이슈가 아닐까 싶다. 민속 문화民俗, folk culture는 대중 문화mass culture나 민중 문화popular culture의 외연과 내포를 넓히는 개념이다. 민중에 의해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온 유형, 무형의 전통적, 보편적 문화를 뜻하는 민속 문화는 민간 생활과 결부된 신앙, 습관, 풍속, 전설, 기술, 전승 문화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그 양적인 범위만큼이나 질적인 깊이 또한 함축한다. 서구적인 근대적 대중 개념이나 매스미디어에 의해 전유된 대중문화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역사성을 갖고 있는 개념인 것이고, 신화나 전설, 풍속 등을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기에 비서구적인, 혹은 아시아적 문화의 특성을 고찰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시한다. 아울러 상층의 외래적 성격이 강한 고급문화, 주류문화에 반하는 하층문화, 기층문화를 겨냥한 개념으로 일상의 생생한 모습을 담아내는 문화이며, 우리 고유의 문화적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개념이기도 한다. 우리 내 일상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는 문화인 것이다. 민풍民風이라는 별칭이 따라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초들의 속된 삶(民, 俗)과 그 특유의 장소성의 맥락local마저 아우르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속미술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마C와 유쥬쥬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작가 모두 서구적인 의미의 팝아트와는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지반에서 작업이 구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속된 삶의 문화 속에서 채집한 각종 잡동사니를 오브제로, 평면으로, 설치로, 수집문화로 활용하는 마C의 작업이나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다양한 수집품 및 오브제를 활용하는 유쥬쥬의 작업 모두, 고급한 문화의 번지르한 모습과 구별되는 민속성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손노동의 참맛을 느끼게 하는 공예적인 면모 역시 가지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가 말한 브리콜뢰르bricoleur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개념이나 설계 같은 논리적 과정으로 판에 박힌 결론에 도달하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주어진 재료로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인디언의 기술’처럼 일상과 삶의 다양한 주어진 재료들로 재치 있고 창조적인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이런 과정에 삶의 색다른 즐거움과 지혜가, 유연한 감성의 동학이 발휘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이 두 작가의 작업은 팝아트의 표피적이고 삐까번쩍함과는 다른 우리 내 문화 고유의 정감 있는 친숙함마저 느껴진다. 여기에 일상의 심미화, 감성화, 미학화는 덤으로 부여된다. 삶의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것들에서 묻어 나오는 감성들을 놓치지 않고 이를 작업의 토대로, 재료로 활용하여 그 감성적 공감대를 다시 대중들과 교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저 촌스러움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스타일과 기법 또한 접목하고 있어 색다른 맛과 멋을 더한다. 민속미술의 설정은 아직 하나의 제안일 뿐이지만, 적어도 이들 두 작가의 작업이 기존의 민중미술이나 팝아트의 식의 좁은 설정으로 국한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여기에 포스트 식의 접두어를 붙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개념적인 한계를 가질 것이다. 오히려 민속의 개념을 서양 문화의 좁은 잣대가 아닌, 좀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삶의 더 미분화된 다양한 문화들을 아우르는 깊이 있는 개념까지 확장시킨다면, 그리고 동시대적인 의미로 발전시킨다면 그 단초적인 가능성을 이 두 작가의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 다른 시각에서, 곧 두 작가의 면면을 통해 더 조곤조곤 확인해볼 수 있도록 하자. 이런 저런 이유로 연장자, 나이순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마C
이 유별난 작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단서 중의 하나가 그가 한때 열혈 민중운동(미술)의 한 시절을 치열한 자신의 삶으로 살았다는 사실 일 것이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변방에서 혹은 다르게. 어쩌면 그가 고민했던 문제의식을 그 시절의 좁은 의미의 민중미술로는 담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두고 (포스트) 펑크나 하위문화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구리기만 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거리감은 있되 그 표출 형태가 남 다른 것이다. 얌전하지 않고, 종종 잡스럽기조차 하지만 진득한 삶의 냄새가 폴폴 풍기는 독특한 작업 스타일이 이를 증거한다. 자신은 아트워크보다 아트라이프라 주장하는 마C의, 일상과 예술이 따로 없는 전방위적인 작가 생활에 있어 단연 주목을 끄는 것이 농축산용이나 산업 페기물 등의 비닐 포장재위에 일일이 수놓은 평면 자수 작업들일 것이다. 일일이 한 땀 한 땀 직접 수놓는 이들 작업은 정성어린 수공예성이나 노동집약적인 성실함도 눈길을 사로잡지만 화면을 가득 메운 잡스러운 도상과 이미지들이 훨씬 더 감각적인 파장을 자아낸다. 사회현실에 대한 다양한 비판은 물론 대중매체가 토해내는 잡동사니 이미지들과 사건들, 욕망과 섹슈얼리티, 신화와 전설, 익명의 군중들과 원초적 야수성의 감각들이 혼성적으로 브리콜라주 되어 있는 유별난 화면을 직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각의 작업들은 사회현실에 대한 작가의 특정한 내러티브를 통한 어떤 발언들이기도 한데, 그 바탕이 되는 도상들이 모두 자신의 삶 속에서 접하는 각종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섞고, 붙이고, 잇는 일련의 기나긴 손바느질 작업을 통해 카니발이나 만다라 같기도 한 잡스러운 세상세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자신의 몸에 고통스럽게 각인되는 피어싱이나 타투처럼 한 땀 한 땀 세상에 대한 작가의 깊은 속내들을 애써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위문화와 펑크식의 콘텐츠들과 자유분방한 배치들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도 그 바탕에서 여성적인 섬세함 혹은 전통 수공예의 멋스러움 또한 풍겨 나와 사뭇 색다른 느낌을 준다. 하지만 마초적인 군사문화의 남성성이나 컨템포러리한 꼴라주같은 이미지성도 느껴지니 전체적으로 이 모두를 포괄하는 잡스러움이라 해야 맞을 것 같다. 여기에 기존 제도미술, 주류미술에 대한 일정한 반발이나 거리감도 자연스럽게 감지된다. 비닐 포장재 자체가 기존 미술제도의 프레임 게임과 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도 이러한 제도 비판을 의식하여 최근의 흰색 톤의 평면작업의 경우, 경박한 유행으로 한 붐을 이루고 있는 모노크롬 현상을 빗대, 화이트큐브의 제도미술을 비꼬기도 한다. 하지만 기존의 것들에 대한 표면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못난 이 사회의 지극히 속된 것들을 자신의 바느질 드로잉처럼 일일이 이어 붙여, 다시 재생시키려는 속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들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용도페기된 것들을 재생시켜 다시, 삶의 문화로 거듭나게 하려는 시도이고, 그렇게 상처 입은 우리 내 삶을 어루만지고 봉합하려는 의미심장한 행위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동안의 개인전의 명칭들처럼 비록 ‘진창’, ‘하류’, ‘그늘’이겠지만, 그럼에도 ‘자생의 꿈’, ‘열망’, ‘해피투게더’를 꿈꾸고, 첫 전시명인 ‘바람은 깃발로 만들고’처럼 아직도 바람을 기다리는 그는 여전히 미래의 삶의 변화를 꿈꾸는 영락없는, 혹은 어쩔 수 없는 작가임에 분명해 보인다.
유쥬쥬
한때, 자신의 꿈은 우주정복이라 할 정도로 갖가지 다채로운 파격과 시도로 미술계를 적이 놀라게 했던 작가가 사뭇 달라졌다. 흐르는 세월만큼이나 생각이 깊어진 것일까, 아니면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작업 방향을 고민해서 일까, 이에 대한 갖가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맥락은 여전하다는 생각이다. 작업실에 널 부러져 있는 각종 재료들과 새로운 작업 구상에 관한 작가의 쉴 틈 없는 수다는 그야말로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충만함 그 자체이며, 기발함과 참신함으로 똘똘 뭉쳐있는 작가적 ‘끼’들을 유감없이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끼와 감각 충만이 문제될 이유는 없을 터, 이를 기만적인 점잖음으로 터부시하거나 작가적 주체성으로 과도하게 연동시키는 세태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유쥬쥬라는 예명만큼이나 신기방기한 작가의 작업은 세상사의 잡스러운 다양성, 감각성, 기발함을 재료로 삼아 작가 특유의 유연하고 순발력 넘치는 감각적 공감대를 만들어간다. 특히나 기발한 일상의 재료적 배합이나 화려한 색감이 인상적인데 이를 마C처럼 단순히 팝아트 계열의 작업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고, 오히려 일상과 비일상, 고급과 저급문화를 가리지 않는 작가 특유의 자유로운 시선을 통한 이미지의 채집과 이를 자신의 미감으로 전용하려는 전략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 같다. 특정한 미술문화의 흐름에 개의치 않는 점, 그리고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신의 혼성적인 미적 전략에 골몰하고 있는 점 등이 유쥬쥬 작가의 변별적인 특징이 아닌가 싶은데, 이런 면모들은 지금 시대의 동시대 젊은 작가들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하는 맥락들이기도 하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 혹은 감각의 강도 면에서는 분명 구별된다. 그렇게 작가는 세상을 자신의 감각적 시선을 중심으로 바라본다. 이에 따라붙는 갖가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은 부차적인 요소, 아니 우연하게 따라붙는 것들로 개의치 않는 것만 같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북한 사회의 기이한 이미지들의 콜라주와 북한 사회의 특이한 선동문구가 기입된 거울 모자이크 작업들도, 작가가 북한이라는 특정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금단의 이질적인 문화적 코드로 작동하는 북한이라는 저 낯선 이미지 자체에 있지 않나 싶다. 혹은 분단과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의 작동으로 울트라 예술 뺨치는 우리 내 사회 현실의 기이함과 유별남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붉은 색 바느질을 통해 분단 이데올로기와 포르노의 이미지를 의미론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는 마C의 작업과는 다른 맥락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거울 모자이크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나 이에 각인된 문구가 의도치 않게 의미하는 성스럽고 종교적인 의미작동과 북한이라는 유별난 사회시스템과의 결합만큼은 이런 작가의 (무의도의) 의도성과 상관없이 읽혀진다. 작가 역시 이러한 다양한 읽기의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마C와 다르게 기존 제도미술의 효과 또한 배제하지 않는다. 결국 작가의 관심은 특정한 문화적 맥락이나 효과가 아니라 작업이 갖는 감각적 다양성과 유쾌한 의미의 발현, 그리고 그 미적 효과에 있지 않았나 싶다. 이를 혹시 모를 사회적 인식의 결여로 몰아세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회적 의미 효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동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건강한 기운이 돋는 세련된 미감의 발휘,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오만가지 세상사를 향한 엉뚱하고 기발한 시선 자체에서 어떤 미덕을 찾아야 하지 않나 싶다. 남북통일 따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주정복마저 꿈꾸는 그 기운 넘치는, 당당한 면모 말이다.
You, 宙主, 魔氏
그동안의 미술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결국은 다른, 이 두 작가, 유쥬쥬마C. 여기에도 희망이 있고, 숱한 가능성이 놓여있다. 민중미술, 팝아트, 일상미술을 포괄하고 아우르는 민속 미술, 손노동의 맛과 멋이 부여된 섬세하고 공들인 작업과정, 일상문화와 장소성의 컬렉션과 아카이빙, 기존의 상투적이고 위계적인 구분을 넘어서는 감각적 인식의 확장, 서구적 시선과 구별되는 비서구적 생활문화의 맥락을 더하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미술어법, 기존의 남성성, 여성성을 가로지르는 양성적이고 중성적인 작업 스타일 등등. 이런 점들이 유쥬쥬마C 작업의 향후의 어떤 가능성들과 재구성해야 할 미술사의 맥락들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다시 이 두 작가의 이름을 고쳐서 불러본다. ‘You, 宙主, 魔氏’, 당신들이(You),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이요宙主, 동시에 신묘하고 예술적 기운들이 넘치는 누구누구들魔氏이라고.
글: 민병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