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 for fun car: Jeong Gyu Lym Solo Exhibition
Jeong Gyu Lim
1999/05/01 – 1999/05/14

재밌는 자동차 드로잉전: 임정규 개인전

참여 작가: 임정규
장소: 대안공간 루프
주최/주관: 대안공간 루프

Drawing for fun car: Jeong Gyu Lim Solo Exhibition

Artist: Jeong Gyu Lym
Venue: Alternative Space LOOP
Organzied by: Alternative Space LOOP

“이보다 더 유치할 순 없다” – 임정규의 잘, 못, 그, 린, 그, 림

어느 날씨 좋은 봄날 <유치부> 국제 사생대회가 열린다. 전세계의 내노라 하는 그림쟁이들이 모두 모였다. 역시 문화왕국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대표 선수를 파견했다. 이름만 들어도 기가 죽는 박클레, 안루소, 박고갱, 복세잔, 피카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최근 혜성같이 떠오른 임정규가 최정화와 박모, 이진경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최고상은 놀랍게도 임정규에게 돌아갔다. 심사위원장 마뒤샹의 심사평을 들어보자.
“그는 천재다. 20세기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이슈들에 대한 표현이 이보다 더 유치하게 표현 될 수는 없다. 그것도 마카(maker)를 써서 말이다”

‘정규교육’을 받은 (임)정규의 그림은 그의 전략적 라인에서 보면, 그리고 유치원 선생님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 못 그린 그림이 아니다. 오히려 잘 그린 그림이다. 그는 승용차와 고속뻐스 그리고 찝차를 능수능란하게 그려낸다. 밑그림도 거의 그리지 않은 채로.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즉흥적으로 그것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반복 훈련을 통해 이미 머릿속에 담아 놓은 자동차의 형태를 기계적으로 토해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점에서는 그는 소위 ‘천진함’이라는 이름의 유치함을 노스텔지아로 갖고 있던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얻은 것 같다. 최소한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짐짓 못 그린 듯 하면서 사실은 절묘한 조형성과 하모니를 연출해내는 박클레나 수백년 간 만장일치로 합의한 원근법의 단일시접을 뒤집어버리고자 하는 복세잔의 전략 같은 것은 임정규의 관심 밖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말이다. 단일 시점의 원근법을 준수하는 임정규의 승용차 그림은 철저하게 정규교육의 강령을 준수하는 아주 착한 어린이의 그림이다. 일부러 몬가 있는 척 엇나가는 비행청소년이 이제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그것에 식상한 심사위원들에게 그저 무식하지만 열심히 들고 파서 결국엔 자동차 하나만큼은 일가를 이룬 그의 행적은 그야말로 굴러들어 온 호박이다! 그러나, 나 루팡은 좀 헷갈린다. 이제 아무도 쓰지 않으려 애쓰는 정규 교육의 방식들을 (임)정규식인 양 특화하고, 그럼으로써 원래는 non-creative했던 수법들을 충분히 유치 순수의 creative한 장(場)으로 승화되었다고 극찬한 심사위원들의 속마음에 대해! 그 동안 심심하던 심사위원들이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의 신화를 만들고자 함은 아니던가!

임정규는 예쁜 여자들을 보면 속직하게 말한다. “당신은 참 아름다우십니다”락. 어린 아이들이 예쁘게 생긴 미술선생님에게 “선생님이 울 엄마였음 좋겠다”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의 직설어법이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그의 고속뻐스 그림에 나타나는 안내원(임정규는 항상 안내원을 늘씬한 미인으로 묘사한다)은 자동차의 남성적 상징성을 극대화하는 데 일조한다. 사생대회 참가자 누구도 유치하게 그려내는 데 몰두하느라 정신 팔려 인간 본성인 성적이미지들을 그려내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박고갱이 타이티부족들의 모습을 진실로 이해하고 표현하고자 했다면 반라의 그들을 ‘서구적 관점의 매력 없는 원시부족 여인’이 아니라 섹시하게 그렸어야 한다. 박고갱 그림의 여인들은 그렇다 쳐도 매춘부를 그렸다는 아비뇽의 처녀들 즉, 피카스의 그림이 유혹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절대 이해가 안 간다. 이성중심주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해체하고자 하는 의무감이 오히려 이들의 그림 속의 대상들을 성적으로 중화시켜 표현한 반면, 소재(자동차)나 기법상 드러나는 임정규의 마초(macho)적 태도를 통해 역설적으로 고발당하고 있는 남성중심주의적 편견은 바로 심사위원들의 낙점을 받은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다시 역설적으로 임정규의 그림을 유치하지 않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게 아니면 또 다른 포장인가?

임정규는 모범생이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작업시간과 귀가, 취침시간은 영화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이 규칙적으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TV 프로그램을 시정하지 못하면 불한해지는 것처럼 일정하며,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주위의 어떤 장애물도 그의 몰입을 방해하지 못한다. 박고호의 그림에 대한 광기와 몰입, 집착은 그 자신을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정규적인 시간에 몰입하는 임정규의 그림그리기는 ‘정규’를 해방시키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인데(사실 2시간동안 루프의 기둥에 ‘낙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그의 모범성과 ‘정규의 해방’ 역시 T5LATKDNLDNJS들로부터 박고호를 제치고 최고상을 수상하는 데 일조했다. 임정규의 정규적 일과가 ‘정규적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정규적 그림그리기를 실천하는 것이라면 미술대학의 출석표는 그들의 그림실력과 정비례해야 할 터인데…흥, 과연 그러한가?

순수한 몰입과 더불어 임정규 그림의 특징은 그림의 부분인 자동차가 관객의 눈을 단일시점으로 붙잡는 듯하다가 그림 전체가 보여주는 평면성에 있다. 못 그린 척 하면서 매우 구체적으로 밀림의 동식물과 여체를 묘사하면서 캔버스 전체를 채움으로서 평면성을 획득하는 장끼를 가진 안루소는 임정규의 그것과 비견될 만하다. 그러나 안루소의 그림은 지나치게 계산된 치밀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임정규는 안루소의 치밀한 구성능력을 통한 신비감을 절대 흉내 내지 못했다. 그 대신 임정규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한글을 ‘그림같이’ 써 내려감으로서 서양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는다. 이 부분이야 말로 서양심사위원 들의 눈을 의심해야 할 필요가 있는 지점이다. 오리엔탈리즘이다!

   

우리에겐 여전히 임정규의 글은 잘 쓰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글체로 보인다. 스페인 대표 피카스의 콜라지 미학을 깔아뭉갠 정규적 작업의 백미는 역시 그의 ‘그림보다 더 못 그린 글쓰기’이다. 피카스가 고작 신문지 쪼가리를 그림에 붙여 놓고 새로운 발견이라고 심사위원들에게 주장한 반면 임정규의 못 그린 글은 한글 필사본의 캘리그라피적 변형의 가능성을 제시한 측면에서 한국의 심사위원에게, 그리고 뭘 모르는 오리엔탈리즘 시각의 서양 심사위원들에게 크게 어필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피카스의 신문지 쪼가리가 ‘무작위적 선택’ 으로 인한 지나친 우연성에 기댐으로서 이미지와 텍스트 간의 최소한의 연결 고리를 끊고 큐비즘적 형태구성의 부분으로 전락한 반면, 임정규의 글쓰기와 자동차 도상의 콜라지는 1차적으로 이미지에 따르는 구체적 의미론적 글쓰기(고속뻐스의 구체적 종류와 배기통 등의 구체적 기능과 본인의 체험을 묘사해 놓은 식)로 2차적으로는 다시 의미를 해체하고 ‘못 그린 글씨’로 승화되고 있다. 이 점은 서구의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동양의 전통적 그림과 글쓰기에 가장 경의를 표하고 있는 지점이 아닌가. 이 순간 원시 마스크를 흉내낸 피카스, 원시부족을 찾아다닌 박고갱, 어린애 그림을 흉내낸 박끌레, 동양적 신비주의를 흠모한 안루소, 일본 판화를 참조한 복세잔과, 박고호 등 각국 대표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임정규를 올려다 본다. ‘싸부님~’ (임정규는 말한다- “니네들 다 뎀벼, 에이젠슈타인과 아르토 니들은 일본연극 ‘노’를 참고해서 영화와 연극을 만들었잖아! 이거보니 죄~ 동양꺼 안 베껴간게 없네 그려, 그러니까 우리가 할 게 없지!”) 그, 러, 나!!! 고작 그 어설픈 안목으로 자들식데로 이해한 캘리그래피적 제스쳐 다위로 동양적 어쩌구 운운한다는 것은 좀 우습지 않은가? 심사위원들의 착오는 동양적 그림그리기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연유한다. 동양화의 전략이란 있는 대상을 없는 듯 그려낸다. 동양화가 임정규의 관광뻐스를 그린다면 관광뻐스를 그리지 않으면서 관광뻐스를 그려야 한다. 이를테면 광광뻐스의 외곽을 그림으로서 형태를 부각시키는 식이다(캬! 이거야 말로 나 루팡의 글쓰기 전략이 아닌가). 이것이 존재와 비존재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를 구분치 않고 통합하는, 없음을 말하며 있음을 제시하는 동양적 사유의 백미가 아니던가. 그런데 임정규의 그것은 일본의 전통적 그림그리기와는 닮았을지 언 정 동양화의 그것은 아니다. 임정규는 무던히도 열심히 자동차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모사’한다. 그것은 이미 임정규의 머릿속에 찰칵하고 찍혀진 사진의 재현이다. 리-픅리젠테이션이란 말대로 ‘다시 보여줌’에 불과한 것을 심사위원님들이 너무 과대포장하는 것 아닌가. 리-프리젠테이션…, 재현은 임정규가 한다. 그런데 제시는 심사위원들이 한다? 나는 임정규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임정규 스스로의 ‘제시(presentation)’를 보!고!싶!다!

PS: <유치부> 사생대회의 최고상 수상자 임정규의 특별 행사의 하나로 루프의 기둥에 그려진 임정규의 전신주 그림을 보고 심사위원들과 참가자들은 다시 한 번 그의 통찰력에 경의로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연극 이론가 아르토(artaud)는 한 순간에 원형 전신주를 사각의 공간에 그려놓는 것을 보면서 ‘마치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큐비즘을 앞서는 토템상’을 연상시킨다고 말했으며, 전신주에 붙은 ‘종업원구함 xx살롱’ 구인포스터를 흉내 낸 그림을 두고 보들리야르는 ‘완벽한 모방의 모방’의 규범적 사례임을 칭찬했으며 영화 <미지왕>의 감독 000은 ‘내 작품의 유치함은 임정규의 그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라고 고개를 떨구었고, 그림 리는 모습을 지켜 본 김대중 대통령은 때 마침 방문한 영국 여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고 했소? 우린 임정규를 심형래(한국의 신지식인 중 한 명)와 바꾸지 않을 것이요. 핫핫핫’

루팡(Loop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