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IM CLUB
1999/06/19 – 1999/07/02

그림 클럽

참여 작가: 노재문, 장해리, 강영민
장소: 대안공간 루프
주최/주관: 대안공간 루프

GRIM CLUB

Artists: Jae Moon No, Harry Jang, Young Mean Kang
Venue: Alternative Space LOOP
Organized by: Alternative Space LOOP

강영민의 그림에 대해 말하다.

강영민은 가끔 자신은 인간 복사기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그림을 정확히 20분안에 완성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그림을 덤핑으로 싸게 팔 수 있다고 합니다. 다소 장난스런 그말은 그러나 정말 유쾌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의 그 말은 엄숙주의자들이나 전통주의자들 심지어 동시대의 젋은 사람들한테도 오해를 받을 소지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흔히 현대미술을 이론적으로 접근할때 쓰는 레디메이드라는 개념과도 별 상관없습니다. 비슷한 이해라면 똑같은 그림을 수도 없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인데, 레디메이드는 그 방법으로서 기계적이고 전자적인 매체가 개입됩니다. 그림을 옹호하는 부류들 사이에선 이때 발생하는 오리지날리티의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도 하더군요. 분명 회고적일 수 밖에 없는 이런 태도는 저는 별로 찬성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그림은 현재 진형형이기 때문입니다. 또 레디메이드가 현대의 문학적인 양상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레디메이드를 말하는 미술이 반드시 현대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부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어쨌든 영민군이 이야기하는 그 태도의 이면에는 온갖 이미지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그림의 의미를 자기식대로 뭇는 과정에서 생겨난, 무의식의 소산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살짝 엿보입니다. 영민군의 그림들을 보면 그가 말한 대로 쉽게, 너무나 쉽게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정말 무한정 똑같은 걸 그려낼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는 단순한 것 같지만 굉장히 복잡한것들이 서로 뒤엉켜 있습니다. 개인적인 것들에서 부터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다양한 매체들에서 읽고 보고 만진 것. 그런 것들이 평범하지 않게. 기상천외한 형상으로 캐릭터화 되는데(흔히 캐릭터 사업이라 할때의 그 캐릭터) 그 형상들은 대부분 웃음을 유발시킵니다. 저는 그 많은 귀여운, 정말 곳곳에 널린 그 많은 캐릭터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강영민의 캐릭터를 생각해 봅니다. 밭가는 돼지, 밤돌이, 성냥팔이 소녀, 야구소년, 손톱깎기 인간, 눈물로 쓴 편지…. 밭가는 돼지를 한번 보세요. 그리고 일을 합니다(돼지가 일을 하다니!!). 표정을 보면
관객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표정입니다. 마치 절망적인 호소같은 이 표정은 그러나 저의 동정을 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적당한 일을 해서 삶을 유지 하는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돼지는 그냥 돼지라기 보다 인간이었던 돼지인데 강영민은 어떤 위악적인 형벌을 그 인간한테 가한거라는 제 나름대로의 상상을 해 봅니다. 그것도 돼지임에도 불구하고 비쩍 말랐으며 일을 해야만 하는 가장 고통스런 형벌을. 그럼 그 인간이란 어떤 종류의 인간일까? 평소 그의 언행대로라면 그가 싫어하고 경멸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어 괴롭히고 싶은 인간인데… 하하 그건 비밀입니다. 스토커님도 한번 그런 인간을 상상해 보세요. 어쨌든 여기서 작가의 이 과잉되고 위악적인 제스쳐는 그림이 그려진 방식과 일체가 돼 결국 굉장한 웃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의 그림에는 위압적이며 과대포장되고 과잉유통된 권위들에 대한 조소,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가장하는 돌발적이고 과장된 행동과 약간은 도착적인 성 심리에 내재한 소년같은 시선, 그리고 지극히 감상적인 로맨티시즘. 이런 것들이 정제 되지 않고 뒤섞여 하나의 인물로, 또 상황으로 나타납니다. 그 인물들이나 상황들은 귀엽기도하고(아니 제발 좀 귀여워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같고), 가증스럽게 앙증맞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를 유발시키기도(주로 과장법으로) 합니다. 우리 주위에 널린 그 많은 캐릭터들이 사실은 시장의 원리에 따라 불필요한 것은 모조리 거세시킨 공허한 것임에 비해, 그의 캐릭터들은 바로 이런 점으로 해서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통제할수 없는 욕망들 사이에서 우리들이 끊임없이 헷갈리듯이 말입니다. 저는 박모라는 작가의 그림을 보고도 아주 많이 웃은적이 있는데 강영민의 그림들은 더 내밀하고 사적이어서 통쾌한 맛은 적으나(박모의 작업은 전복할 타켓이 명확합니다. 명확한 권력, 미술사의 재료) 더 풍부합니다. 그의 말을 빌면 쫀쫀하고 처연한 뒷맛이 남는다고나 할까요? 훨씬 더 사적인 곳으로 진화되었다고 할까요? 저는 그의 그림의 이런점을 주목합니다. 세상을 비판적으로 인식할때, 유머를 가지기란 상당히 힘든 것 같습니다. 진지함이 지나쳐 결국 자기 폐쇄적인 구조를 가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가들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많은 부분 그 진지함은 허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식이 현실을 넘어서는 순간에 그런 이미지들이 나오지 않나 생각합니다. 강영민의 재기발랄함은 이런 문제들을 슬쩍 비켜나가거나 아니면 그위를 가볍게 날아갑니다.
이건 같은 그림클럽멤버인 노재운의 의식적인 심각함과는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장해리의 그림에 대해 말하다.

장해리의 그림은 사실 그림그리는 사람들이 더 좋아하더군요. 그건 그림이라는 매체가 보여 줄 수 있는 특유의 요소가 많아서 일겁니다. 저는 그녀의 그림에서 그림그리는 노동의 즐거움을 읽을 수 있는데 만약 어떤 의도에 따른 부수적인 요소로 그게 읽혀졌다면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강영민과 노재운이 잘 안되는 것이 있는데 저는 바로 이 점인것 같습니다.
그들의 그림에선 소위 노동의 흔적은 별로 안 보입니다. 그리고 그걸 그리 즐거워 하는 것 같지도 않구요. 뭐 성격차이가 기본적으로 작용하겠지만 굳이 장해리와 비교해 보자면 그들은 소재나 주제에 대해서 어떤식으로라도 점검을 해보고 확인을 하는 과정을 꽤 꼼꼼이 거쳐야 하는 것 같은데, 그 과정을 통하고 나서 그림으로 옮기기까지 또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건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건 아닌것 같습니다. 다만 90년대초의 그 어정쩡한 시대에 대학생활을 보내면서 생긴 불안같은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 역시 그들과 같은 문제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리가 그려놓은 사물들을 보면 제 상식을 훨씬 상회하는 것 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점도 있습니다. 무리한것 같지만 만약 세대로 나누어서 그림이라는 장르를 생각해 본다면 장해리는 꽤 특별한 세대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90년대 초의 소위 거품과 과잉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미술계에도 상당한 변화를 몰고왔는데 그때 미대에 다니거나 미술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매체를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그림이라는 매체는 인기가 하락되었고, 별로 생산적이지도, 그렇다고 현실을 담을 그릇이 될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에 다른 매체를 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그게 나빴다라기보다 필요이상의 비하가 그림에 가해졌다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고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연명하려고 미술사의 시체를 뜯어먹거나 다른매체에 대한 안티로서 그림을 위치시키려는 경향이 다분한것 같은데 솔직히 그들이 생각하는 그림이 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림은 영화와도 컴퓨터그라픽스와도 틀린 고유의 존재 방식이 있으며, 함께 가는 것이지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닌것 같은데, 무덤속에서 시체를 뜯어먹으며 목숨을 좀 더 연명시키는 것 보다 그냥 무덤위로 나올수는 없는걸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장해리같은 세대의 특징은 그와같은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화나 기타 다양한 매체들은 선택적으로(즉, 취향에 따라) 향유되며 하나의 환경으로써 (마치 꽃이나 나무같이) 그들의 그림에 나타납니다. 장해리 그림중에는 영화를 본 후 그 영화들의 장면이나 포스터를 자기식으로 해석해서 그린 것들이 많은데 이런건 좋은 보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영상과 대결하려는 무모한 시도따윈 전혀 없으며 그냥 자기가 산책하다 본 길가의 장미와 나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루프에서 본 임정규의 개인전에서도 그와 비슷한 걸 본적이 있는데 이들에게서 정말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봅니다. 물론 이들이 가진 그 자연스러움의 장점을 끝까지 밀고나가는데 더 많은것이 달렸지만 말입니다. 예, 잠시 흥분 했군요. 세대별로 나눈다는 것도 한편으론 넌센스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 강영민과 노재문은 좀 꿀꿀해 보이기도 하니까요. 그들도 같은 세대로 묶어 둘까요? 그들이 감격에 몸을 떠는 모습이 보이는군요.
후후….

예, 왼쪽의 이 그림은 아주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인데, 다 허물어져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심의 아파트를 그린 거예요. 제 식의 관점에서 해석해 보면 (학교 다닐때 시위 몇번 어정쩡하게 참가해 본 자의 관점) 이 서민 아파트라는 공간을 생각 안해 볼 수 없지요. 이런 아파트는 여기저기 손때가 묻은 오래된 소지품처럼 그런 느낌이 들어요. 목동이나 일산같은 곳의 그런 빤듯빤듯한 아파트와는 많이 틀리죠. 이 영세아파트는 아마 60~70년대에 지어져 지금까지 온 모양인데, 아마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라면 한 세대가 자라나 또 한 세대를 낳을만한 기간이지요. 마치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버지의 굳은살 배긴 손바닥처럼 그런 모양이 되어갔던 이 아파트에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겁니다. 저도 이아파트를 처음 보았을때, 모두를 도시로 떠나보내고 이제 저세상으로 갈 날을 초연히 기다리는 우리들 부모님이나 부모님의 부모님 세대같기도 하고 그래서 가슴이 찡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녀의 이 그림은 이런 느낌까지 바탕에 깔아 놓을 정도의 풍부함을 갖추고 있어요. 그러나 그녀가 결코 제가 말한 이런것을 의도하진 않았다고 봐요. 만일 이런걸 의도했다면 훨씬 더 의미가 약화되거나 작위적이 되었을 겁니다. 이 그림의 시점을 한번 주목해 보면 그걸 확인할수 있는데, 외부에서 이 건물을 그린게 아니라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시점이예요. 바로 이 점이 이 그림의 풍부한 정서를 설명할 수 있는 한 단서가 될 만도 한데, 이 시점의 주체를 한번 상상해 보면 이점은 더 명확해 집니다. 먼저 그림그리는 작가의 시점일 수도 있겠고, 거기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특히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고 싶다?_여기에 나같은 꿀꿀한 자의 관점도 포함됩니다)의 시점일 수도 있으며, 그냥 한번 방문했던 사람의 것일 수도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건물 자신의 시점일 수도 있죠. 어쨌든 이 모든 것들이 바라보는 대상은 너무나 청명한 하늘과 기분좋게 밀려오는 파도 입니다. 이때 현실은 저의 머리속에서 일종의 업그레이드를 감행하는데 저의 꿀꿀함과 경직된 세상보기에 스트라이크를 한방 먹이죠. 해리 그림의 힘은 이와같이, 사고와 그려진 대상사이를 관통하는 그녀 특유의 경험적인 시선과 그 시선을 요리하는 형식의 참신함, 그리고 관객을 향해 열려진 확장성에 있습니다.

노재문의 그림에 대해 말하다.

노재문의 그림은 일단 ‘영화적이다’ 라고 할만 합니다. 그는 이야기하길 하루라도 비디오 한편 안보면 눈에 핏발이 선다고 합니다. 어쨌든 영화적이라는 것은 그의 그림에는 항상 어떤 상황을 암시하고 있으며, 곰곰히 보면 하나의 작은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영화적 어법을 교묘히 그림에 차용한 것 같은데, 주로 캐릭터들이 전면에 부각됩니다. 그러므로 보는 사람은 어디선가 본듯하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 아리송한 기분으로 그 인물을 통해 현실을 그로테스크하게 또는 느와르적(작가 본인은 이 단어를 더 선호합니다)으로 다시 생각할 여지를 남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현실은 작가가 영화, 사진, 만화 같은 것에서 제제를 취한 이상 그것을 다시 재구성해볼 그 현실도 거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노재운은 그림을 통해 현실의 이런 여러 이미지들을 소위 키취적이 아닌 자기식의 그럴듯한 방식으로 다시 가공해 냄으로써 비판적인 기시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사실 이점은 이 노재운이 가진 현재의 오만한 의도이긴 하지만 꼭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작가는 그런 내용적인 면들을 나타낼려고 그림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즉, 색채, 획, 선…)로 그걸 만들려고 하는데 다소의 과욕을 부리기 때문에 작가자신도 지금 헷갈리는 어떤 지점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예, 강영민과 장해리와는 다르게 강력한(강렬한이 아닌)색채를 구사하는 노재운의 그림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쾌감을 보는 사람에게 전할만 합니다. 그러나 이 작가가 좋아하는 쾌감은 즐거움, 맑음, 낙관적, 이런 단어들이 연상된다기 보다 우울함, 음모, 지배, 상처, 살인, 변종 뭐 이런 단어들이 먼저 연상되는군요. 글쎄요.. 그의 생각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일종의 비극적인 이런 세계인식을 즐긴다는건 다소 병적인 성향이 있는것 같군요. 그래도 건전 ‘천사표 내지는 전시때만 싸이코’ 라는 혐의는 들 수 없는 것 같으니 그래도 봐줄만 합니다. 어쨌든 시각이미지 전반에 대한 그의 느와르적 관심사가 계속 더 확장되고 깊어져서, 법으로 심판할 수 없는 하나의 강력한 이미지 패밀리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암흑의 핵심을 향해 다가가려는 그의 그러한 노력에 많은 기대를 걸어봅니다.

예… 다소 산만하지만 이렇게 세명의 작가를 훑어보니까 동시대의 여러 환경들과 그림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쓰는 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구요. 저는 이들을 통해 읽을 수 있는 현재라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보기 좋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이를 곳에 대해 미리 판단하지 말기로 하고 이들이 무슨짓을 하든 그냥 성원해 주기로 해요. 더위에 몸조심하시고.

클라우디가 스토커님의 건강을 빌며, 이만.

*스토커에게 보내는 편지

스토커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후…날씨가 점점 더 더워지는군요. 정말 서울에서 맞는 여름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저에게는.. 어린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서 그런지 발가벗고 뛰놀던 고향의 강이며, 타는듯한 백사장, 매미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버드나무들이 그립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금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답니다. 왜냐구요? 서울이나 거기나 이제는 똑같아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파괴되어가는 고향의 공간을 지켜보면서 저는 차라리 외면하는 쪽을 택한것 같습니다. 물론 그 시절이 좋았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구요. 여름이 되면 가끔씩 떠오르곤 하는데 그럴수록 저는 줄기차게 서울에 눌러있기로 작정한답니다. 무슨 쇼부를 보고싶은 심정이 작용하는데 일종의 오기같은 건가봐요. 전형적인 지방컴플렉스지요.

예, 제 사이트에 보여 주시는 님의 관심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그림클럽전시에 대한 글을 강영민씨로부터 부탁받게 되었죠. 그는 제가 일전에 제 게시판에 쓴 해리그림에 대한 글을 보고 무척 마음에 들어 하더군요. 그래서 내친김에 그림클럽 맴버들에 대해서 한번 써보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자신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 우리와 같은 세대인 이들에 대해 뭔가를 말 한다는 건 나름대로 가치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제 식의 관점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 관점이 아직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비약하는 관점일지라도 그건 오직 저의 한게일 뿐이며, ‘본 것 중에서 아는것만 쓰겠다’는 저의 모토가 또한 유치할지라도 참고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안다는 것은 알고보면 지식이나 본질의 문제라기보다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의 영역에서 이상하게도 왜곡되고 은폐된 이런 상식적인 것들은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화와 무관심을 만들어왔습니다. 미술인들 사이에선 오히려 더 심한것 같습니다. 전 가끔씩 일종의 공범의식 같은걸 이들 사이에서 느끼는데 참 희안한것 같습니다. 예, 그러나 오늘은 이런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만두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것은 ‘미술이 아니라 그림’이며 그것도 그림클럽이라는 조금은 단도직입적인 단어(왜일까?)로 잠시 연결될 뿐인 화가들에 대해서 입니다. 명사와 명사가 결합되있는 이 단어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데, 적어도 이 말속에는 모임의 목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림클럽? 그림그리는 애들이 모인.. 근데 이게 뭐 특별한 것도 아니고 전시라는 형식을 빌어야할 무슨 이유라도 있을까? 천진난만함을 가장한건지 아님 젋은이다운 패기가 상실된건지(많은 젋은 그룹들의 경우 일단은 자신들의 시대에 대한 전투적인 뉘앙스를 가진다. 어찌됐든간에), 하다못해 대한민국의 그 수많은 모임들의 명칭에 숨겨진, 단합된 의지로 확실한 목적을 성취하자류의(하나화라는 명칭은 그런 의미에서 그랑프리감이다-미술 부문에서는 A,G그룹이라는게 있답니다) 결과가 애초의 취지를 완전히 무색케하는, 가끔은 물불안가리고 열심히, 무식하게 열심히, 그래서 열심히한다라는 말을 빼면 작업이 성립되지 않아, 정말 열심히 살게하는 그런 이름이라도 짓지, 아님 유행따라 일단은 멋있어뵈는, 현대적인 감각을 총 동원한 듯하나 결국 뭐 별볼일 없는 그런 이름은? 아닙니다. 이 이름은 우연히 지어졌고 확실히 이번 전시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더 들어가 보면 그안엔 첨예한 거부의 몸짓이 있고, 항상 고착된 상태로 있는, 무언가를 인용하고 주석을 붙임으로써만 권위를 획득할 수 있는, 일견 진지한듯하나 너무나 안일한 그런 방식에 대한 열광적인 혐오와 그림은 결국 컨셉이 아니라 몸이라는 것을 어렵게 알아낸, 그런 화가들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이들의 말을 빌면 한국에서 그림이라는 것은 이제야 시작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화가들이 젋은 세대에서 나오기 시작하고 있으며 그들에게서 많은 자극을 받는다고 합니다. 미술사조와 학벌, 파벌에 얽매이지 않고 교수이거나 공모전 입상경력이 작가의 격을 대신하지도 않는 철저히 혼자인, 그래서 그림은 오히려 덜 억압적이고 당당한, 하나의 개인적인 비젼이 그 안에서 성장하는 그런 그림들말입니다. 전 그런 그림들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림클럽의 작가들은 그 개인적인 각자의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