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민은 1999년 대안공간 루프의 개관 당시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블랙 유머를 담은 캐릭터로 제 시대적 상황을 표현한 작업들을 진행했다. ‹배고픈 돼지›, ‹거만한 거지›, ‹나대로씨›, ‹국물튀김›과 같은 작가의 캐릭터들은 팝아트적인 컬러풀한 작업들이었다. 2004년 첫 개인전에서‹조는 하트›, ‹엉엉 하트›, ‹쿨쿨 하트›, ‹깨는 하트›, ‹해골 하트› 등 풍자적인 시각으로 보편적인 아이콘인 하트를 다룬 회화, 설치와 플래쉬 애니메이션 작업을 소개했다.‹조는 하트›는 뵈브 클리코, DKNY 등 다양한 상품들과 콜라보레이션을 가능케 했고, 이후 강영민은 전시기획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 음반 제작, 파티 기획, 브랜드 런칭 행사의 아트디렉팅 등 예술과 비예술 사이를 넘나드는 활동을 진행했다.
2005년 ‹내셔널 플래그›라는 세번째 개인전에서 강영민은 태극기의 태극 부분을 하트로 바꾸고 의인화한 캐릭터를 소개했다. 작가는 웃거나 졸거나 또는 눈물을 흘리거나 입맛을 다시는 등 다양한 표정을 한 태극기들을 갤러리 벽에 높이 걸어 관객들이 고개를 들고 전시를 관람하게 했다. 당시 강영민은 이 전시를 ‘인고의 역사를 겪었지만 사랑을 잃지 않은 우리민족을 표현했다’ 고 말했다.
마릴린 맨슨을 닮았다는 이유로 이명박을 찍으려 했다는 강영민의 유머러스하면서 순진하기까지 했던 시대의식은 MB의 시대를 지나 2012년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큰 변화를 겪는다. ‘한 집에 내가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한 인터뷰에서 밝히며, 강영민은 자신이 살고 있는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정희와 박근혜를 알아야 함을 깨닫는다.
2013년 4월부터 강영민은 디자인 평론가 최범과 함께 ‹박정희와 팝아트투어›를 시작으로 매달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는 팝아트투어를 진행했다. 2014년 8월까지 박정희 기념관, 5.18과 팝아트투어(광주 민주화묘지, 메이홀, 광주시립미술관), 주한미군과 팝아트투어 (동두천 미군기지 캠프 데이비스), 안중근과 팝아트투어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전태일과 팝아트투어 (동대문 평화시장) 등 전국을 다니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연구했다. 2013년 7월 개인전 ‹국가와 혁명과 너›에서는 박근혜와 체 게바라를 합성한 회화 작품‹박게바라›와 함께 박정희의 휘호들을 작업의 소재로 삼는다. 강영민은 ‘박통의 ‘말씀’들이 근대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말씀들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거나 저항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피와 땀을 붉은 색으로 표현했다’ 고 말했다.
팝아트가 대중에 관한 예술이라면, 강영민은 한국의 대중을 예술 안에서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해고민하고 있다. 대중이라는 주체를 재현하는 한가지 방식은 그 대리물, 즉 소비의 대상들이나 사회적 관심을 끄는 상황들을 통해서다. 예를 들면 태극기 집회와 같이 대중들의 문화가 하위문화로 전도되는 현상을 작가는 재전유한다. 이는 기존 자유주의자들이 태극기 집회를 배제해야 할 대상이나 투명인간으로 취급하는 태도와는 분명 다르다. 역설적으로 이는 박정희라는 파시즘을 예술적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작가의 충동과 유사하다.
이번 전시에서 강영민은‹소셜팝›에서 더 나아가 대중문화 속 이미지와 박정희, 박근혜, 김정은, 북한의 포스터를 뒤섞는다. 예술적 표상이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가 거울에 비친 이미지라고 한다면, 강영민의 작업들은 단순히 부르주아지의 욕망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예술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매개의 문제를 뒤틀고 자극한다. 이는 대중문화에서 저항과 위반에서 시작하여 산업화된 문화 변용을 겪고, 결국 상품에 이르게 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강영민은 부르주아 미학 이데올로기에서 이질적인 금기 요소들, 특히 파시즘적인 주체들이나 하위 문화를 현대 미술 안에서 충돌시키고자 한다. 이 곳에서 금지된 쾌락은, 그리고 금지된 사랑은 그 주체를 드러낸다. 이는 자유주의와 자유주의 바깥의 규범적이지 않은 공간을 생성하고자 하는 작가적 욕망의 구현이다.
글: 양지윤
팝아트 투어 – 여행과 예술: 주체의 테크놀로지
낭만주의와 여행
“나를 찾아 떠난다.”
여행을 수식하는 단어들에 유독 낭만주의의 색채가 깊이 배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면에서 여행과 예술은 쌍생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의 역사는 길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예술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 이후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술이 주체의 테크놀로지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내적 세계의 추구이다. 그것은 외적 세계로부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기제이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여행에 주어진 숱한 낭만주의적 수식은 결국 외적 세계와의 만남을 통한 내적 세계의 추구를 은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예술과 만난다. 다만 여행과 예술의 차이는 만남의 방식에 있다. 예술이 내적 탐험을 통한 자아의 여행이라면 여행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한 자아의 예술인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나를 찾아서) ‘떠남’이 아니라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만나는가, 하는 조우의 양식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주체의 테크놀로지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낭만주의와 여행의 공통점은 어떤 의미에서든 모두 지금 이곳 현실의 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다만 부정의 내용과 방향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그 성격이 결정될 뿐이다.
유사 낭만주의로서의 교양여행: 그랜드 투어
근대적인 의미의 여행의 시작은 18세기 영국의 ‘그랜드 투어(Grand Tour)’이다. 그랜드 투어는 유사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낭만주의란 기본적으로 몰락한 귀족의 세계관으로서, 부르주아지에 의한 현실에서의 패배를 보상받기 위해 초월적인 내적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낭만주의 예술의 내용은 결코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혁명… 에밀리 브론테의〈폭풍의 언덕〉에서 보듯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이승에서의 육신이 식은 뒤 천상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낭만주의는 모든 부르주아적/ 합리주의적 현실에 대한 부정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정반대편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낭만주의를 속류화한 것이 바로 영국의 귀족 문화였다. 영국은 프랑스에서와 같은 혁명을 겪지 않았고, 대신에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타협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어내었다. 귀족은 부르주아화되었으며 부르주아지는 귀족적인 생활양식을 전유하였다. 영국의 귀족계급은 몰락한 적이 없었으며, 그런 점에서 영국의 낭만주의는 그 계급적 토대 자체가 기만적이다. 영국 낭만주의는 현실의 상실을 통해 초월적 주체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연장으로서 주체의 확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랜드 투어이다. 그랜드 투어는 몰락한 적 없는 귀족과 젠트리의 낭만주의적인 제스처였다. 그래서 그것은 낭만주의를 속류화하고 외부세계로의 여행으로 교양을 대체한 것이었다.
존 버거가 적절히 지적하고 있듯이, 18세기 영국의 풍경화가 실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의 초상화에 가까웠던 것처럼, 그랜드 투어는 외부로 확장된 풍경화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엘리트들의 교양여행이었고 그들은 돌아올 때 한결같이 이탈리아의 예술품을 전리품처럼 가지고 왔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화〈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 1985년)〉에서 여자 주인공이 피렌체를 여행하면서 만난 자유분방한 남자와 고지식한 약혼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은 사실 낭만주의에 대한 조롱에 다름 아니다. 그랜드 투어가 낭만주의 예술의 대체물임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낭만주의가 실현을 거부하는 것을 굳이 실현시키려 함으로써 그랜드 투어는 예술을 좌절시킨다.
원초적 낭만주의로서의 답사: 반더포겔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 몰락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독일에서의 낭만주의란 어떤 의미에서 이중적인 몰락이라고 할 수 있다. 애당초 부르주아 혁명에 의한 국민국가 건설이 불가능한 곳에서 낭만주의는 원초적인 방향으로 향한다. 그랜드 투어가 교양(Bildung)으로서 예술을 대체했다면, 20세기 독일의 ‘반더포겔(Wandervogel)’은 자연과 신체로 예술을 대신한 퍼포먼스였으며, 퍼포먼스로서의 반예술(Anti-art)이었다. 철새라는 뜻을 지닌 이 독일어는 후발 국민국가 독일이 국민을 형성해내기 위한 집단적인 국토 답사였다. 그래서 독일 낭만주의는 꿈이 아니라 자연과 신체에서 원초적인 초월을 찾는다.
물론 독일 낭만주의 문학, 즉 슐레겔이나 괴테의 문학 역시 초월적인 감정을 다룬다. 하지만 그것은 영국이나 프랑스 문학처럼 부르주아지라는 타자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귀적(再歸的)이다. 그런 점에서 독일 낭만주의는 기본적으로 민족적인 상처에서 출발한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숭고 회화는 잃어버린 아득한 세계(실은 소유해본 적이 없는)에 대한 동경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독일 엘리트에게 자연이란 소유의 열망에 대한 표현으로서, 영국 귀족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풍경에의 소유와는 반대편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충동은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20세기의 제3제국에 이르기까지 확장된다. 나치의 구호가 되는 ‘피와 땅(Blut und Boden)’의 바탕이 그것이다. 1941년 나치가 러시아를 침공할 때 내세운 주장은 ‘레벤스라움(Lebensraum)’의 확보였다. ‘생활권’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레벤스라움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 독일의 강박관념이었다. 그러니까 그랜드 투어가 유사 낭만주의적 주체를 형성하는 기제였다면 반더포겔은 전체주의적 주체를 육성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비교양, 비장소, 비합일하는 주체: 팝아트 투어
올여름 페이스북은 베네치아, 카셀, 뮌스터로의 여행 사진으로 넘쳐났다. 여기에 요코하마 트리엔날레까지 추가되면 그랜드 슬램이 달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랜드 투어이다. 오늘날의 어학연수와 교환학생, 배낭여행 등은 모두 그랜드 투어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미술대학에 유학하고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에 출품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 미술가들의 공통된 꿈이다. 우리는 모두 18세기 교양인의 후예를 꿈꾸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박정희 시대로부터 유래하는 ‘국토순례단’과 해병대 극기 캠프가 인기를 끌고 있다. 해외 유학이 오늘날의 그랜드 투어라면 국토순례단과 해병대 극기 캠프는 반더포겔이라고 할 수 있다.
팝아트 투어는 그랜드 투어도, 반더포겔도 아닌 전혀 다른 주체의 테크놀로지를 추구한다. 그것은 유사 낭만주의로서의 여행과 국토 사랑으로서의 답사를 거부한다. 그런 점에서 팝아트 투어는 낭만주의적 주체와 전체주의적 주체를 교란시킨다. 예컨대 박정희의 국토순례단이든 민중미술의 풍경화이든, 비록 그것들이 서로 다른 역사관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 대지와의 합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보면 공통된다. 그렇게 보면 국토순례단과 민중미술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팝아트 투어는 대지와 주체의 합일을 추구하지 않는다. 팝아트 투어는 그랜드 투어의 낭만화된 여행과 국토순례단 또는 민중미술의 민족주의적인 정념을 모두 반대한다. 대신에 이 땅이,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낯선 타자들의 공간이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팝아트 투어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헤테로피아를 찾아간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적인 재해석이다.
그래서 모든 주체들이 대지에 자국을 남기고자 할 때 팝아트 투어는 ‘비판적 거리두기’를 선택한다. 이곳은 나의 땅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동일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것은 장소를 비장소화하고, 장소와 동일시하는 주체를 해체하고자 한다. 팝아트 투어는 자연과 주체를 동일시하지 않으며, 위대한 대지의 어머니로부터 솟아나는 민중의 신화를 낯설게 바라본다. 팝아트 투어의 주체는 스스로 주체임을 의심하는 주체이다.
그런 점에서 팝아트 투어는 그랜드 투어도 반더포겔도 아닌, 그 어떤 여행 서사로도 환원되지 않는 주변적이고 낯선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팝아트 투어는 주체를 정박할 곳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돌아와야 할 곳도 없고 떠나서 찾아야 할 자신도 없다. 팝아트 투어는 나 자신이 철저히 타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여정일 뿐이다. 그래서 이 땅은 왈칵 끌어안고 뜨거운 입맞춤을 해야 할 신성한 대지가 아니라 낯설고 차갑고 혼란스러운 공간일 뿐이다.
팝아트 투어도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교양여행이지만 그것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은 결코 돌아오는 법이 없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땅 밟기’가 아니라 일종의 ‘땅 잃기’이다. 그래서 그것은 다크 투어리즘일 수도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다크가 아니라 림보의 세계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림보, 그 중음신(中陰身)의 세계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모호하면서도 불투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팝아트 투어는 유사 낭만주의적 주체와 전체주의적 주체의 죽음 위에서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간 여행이기도 하다.
*팝아트투어는 팝아티스트 강영민과 디자인평론가 최범이 기획한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는 투어프로그램입니다. 2013년 4월 13일《박정희와 팝아트투어》를 시작으로 2014년 4월 19일《4.19와 팝아트투어》 까지 총 17회 진행되었습니다. 자세한 연혁은 다음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m.facebook.com/popartcoop/
글: 최 범, 디자인 평론가
반정치시대의 정치작가 – 정치의 위치에 대한 집요한 질문
여덟 번째 강영민 개인전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정치의 장소”일 것이다. ‘일베 사태*’ 이후에 강영민은 꾸준히 정치의 문제를 제기해온 흥미로운 작가였고, 이번 개인전은 그 동안 발전시켜온 작가의 생각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이렇게 정치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는 작가를 보기란 드문 일이다. 서양미술’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선진문물’이고, 이런 한계 때문에 현실과 마주하려는 용기는 한국의 ‘서양미술’에서 종종 거세되기 마련이었기때문이다.
물론 ‘서양미술’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예술 자체는 정치와 무관한 것이어야 한다. 심지어 정치를 다룬다는 민중미술조차도 이제 정치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왠지 ‘촌스럽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날것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어딘가 ‘예술’이 아닌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 이른바 ‘예술성’으로 승화한 정치야말로 감상 가능한 ‘아름다움’이라는 이런 믿음은 시장의 규범이기도 하다. 이 규범을 정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수집가들이다. 수집가가 원한다면 민중미술도 훌륭한 ‘사회예술’이 될 수 있고, 미래를 위해 투자할 만한 종목일 수 있다.
강영민은 어떤 작가들보다도 이 문제에 민감하다. 그는 수집가들을 위해 작품을 그리지 않는다고 선언한지 오래다. 그러나 어떤 작가든지 공공연하게 수집가들을 위해 작품을 제작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다만 그 시장의 규범을 체화 할 뿐이다. 강영민은 이 ‘체화의 복종’을 증오한다. 이번 개인전은 이런 그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놀랍다. 앞서 언급했듯이, 강영민이 관심을 갖는 문제는 ‘정치의 위치’이다. 그가 정치적인 발언을 작품에 담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정치적발언들을 행하는 ‘행위 주체’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의 작품에서 이 ‘행위 주체’는 얼룩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처녀상〉을 보자. 이번 개인전의 상징성을 단번에 드러내는 작품이 바로〈처녀상〉이다. 이 작품은 수많은 암시를 내포하고 있지만, 가장 전면에 드러내고있는 것은 종교와 정치의 일치, 다시 말해서 신정일치체제에 대한 패러디이다. 전근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신정일치체제에 대한 열망이 왜 오늘날까지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그는〈처녀상〉을 통해 묻고 있다. 물론 이 종교는 더 이상 신을 믿는 신앙의 공동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신을 시장으로 대체하고 화폐가치를 신봉하는 것을 절대적 선으로 여기는 세속주의의 종교성이다. 종교가 아닌 종교성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처녀상〉은 반종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종교성을 닮은 모습으로, 아니 더 나아가 그 종교성과 경쟁하는 형상으로 앉아 있다.
강영민의 작품들은 이런 의미에서 재현할 수 있는 것만을 재현하는, 그럼에도 그 재현의 배치를 바꿔서 ‘행위 주체’라는 얼룩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를 자아낸다.〈처녀상〉은 무엇을 질문하는 것일까. 물론 이 작품은 단순히 장안의 화제였던 ‘소녀상’을 기표만 바꿔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기표 바꿔치기’를 통해 강영민이 묻고 있는 것은 ‘소녀상’이라는 형식의 논리이다. 이 형식의 논리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처녀상〉에 함께 배치되어 있는 노무현과 문재인이라는 정치인의 이미지 역시 이런 의미에서 맥락을 이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맥락을 벗어남으로써 기표들은 낯선 의미들과 충돌하면서 교환의 구조를 폭로한다.
우리가 ‘소녀상’을 향해 물어야할 질문이 〈처녀상〉을 통해 현시한다. 그 질문은 “왜 정치의 자리에 종교의 형상이 와 있는가?”이다. 이데올로기는 정치를 봉합하는 세속주의의 종교성이다. 강영민은 이 종교성의 정체를 묻고 있다. ‘소녀상’이 민족주의라는 세속 종교성의 형상이었다면, 박근혜는 극우 정치의 자리에 온 종교성의 형상이었다. 왜 정치의 자리는 이처럼 ‘종교성의 우상’으로 점유 당하는가? 무엇이 이 우상을 그 자리에 세우는가? 정치의 진리는 왜 종교성의 그늘로 숨어드는가? 그는 예술가이기에 이 질문에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처녀상〉이외에 다른 작품들 역시 같은 맥락에서 대답 없는 질문들을 다채롭게 던지고 있다.
박정희와 유신을 대표하는 이미지들은 그의 화폭으로 옮겨지면서 ‘다른 형상들’로 거듭 난다. 그의 대표 상징인 ‘조는 하트’와 서로 맥락이 다른 이미지들이 모여 충돌한다. 영화〈황해〉의 하정우를 박근혜로 바꿔 치기 해놓은 작품 역시 대중문화에서 드러나는 재현성과 박근혜의 문제를 겹쳐 놓는 시도이기도 하다. 박근혜의 ‘정치성’은 이처럼 대중문화의 재현성을 통해 거세되어 버렸다. 이 거세의 장치들이 무엇인지 그의 작품들은 내키는 대로 탐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도발적인 내용들을 감추고 있음에도 그의 작품들은 ‘서양미술’이라는 사각형의 틀 내에서 ‘안전’하게 관객들을 유인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도발은 밖으로 향한다기보다 안으로 향한다. 전시 공간 전체가 침침한 벙커처럼 꾸며져 있다는 것도 이런 배치의 의미를 가중시켜준다. 작품을 보기 위해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 가야한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의 배치는 ‘침잠’이라는 신호를 보낸다. 상승이 아닌 하강. 과거 바로크 미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애이다.
날렵하고 명랑한 팝아트에 바로크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는 것은 충격인데, 이런 까닭에 전시를 본 관객들은 웃고 즐기기보다, 골똘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즐거운 반주로 흘러나오는 슬픈 노래 같은 주정이 강영민의 작품들에 드리워져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강영민이 질문하는 ‘정치의 장소성’ 문제는 결과적으로 정치라는 문제가 위상학적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정치는 우발적이고, 따라서 결정불가능하다. 절대적인 정치체는 없다. 정치는 끊임없이 흐르는 공백의 방황이다. 공백은 국가로 셈해질 수 없는, 재현 불가능한 것들이다. 이 재현 불가능한 것들이 재현을 넘볼 때, ‘정치적인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지점들이 생겨난다.
강영민의 작품들은 바로 이 지점을 노린다고 할 수 있다. 우상이 점유한 정치의 경계선들을 교란시키는 ‘정치적인 것’을 현시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그 현시는 어떻게 이루어져야할까? 강영민은 ‘위치 이동’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한다. ‘위치 이동’을 만들어내는 ‘행위 주체’의 얼룩을 계속 투여함으로써 기존의 욕망 구조는 혼란에 빠진다. 선과 악, 참과 거짓, 미와 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는 경계들에 숨어 있는 양가성을 그는 찾아내려고 한다. 그의 작품을 보는 순간 해석의 난제에 빠지거나 이해 불가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선명한 언어적 환유를 거부한다. 그의 작품은 환유 할 수 없다. 교환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의사소통에 저항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사소통의 기표들은 파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의 작품들은 드러낸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왔던 ‘정치적 결단들’은 실제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 구호는 공허하다. 그러나 그 공허에 구호의 목적성이 있다. 목적 없는 목적성이라는 점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라는 구호는 ‘예술’이라는‘세속주의의 종교성’을 획득한다. 강영민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치를 나누는 배치 구조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로서 그는 이 구조를 뒤틀어서 무엇인가 튀어나오게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 결과물에 대한 해석은 관객들의 몫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상대주의에 저항하는 무엇인가를 그의 작품에서 발견할 책임도 관객들에게 있다. 해석은 상대적일 수 있겠지만, 그의 작품은 상대적이지 않다. 그는 분명 싸우려고 한다. 마냥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 깊숙이 심각한 정념이 그의 작품들을 수놓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정념의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하진 않다. 그는 방황하고 있다. 이 방황이 끝나는 어디쯤에서 그는 ‘정치의 위치’를 해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실마리를 찾지 않을까? 다음 전시에서 그는 이 문제를 더 집요하게 몰아붙인 결과물들을 내어놓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이 걸려 있는 전시장은 지옥으로 끝없이 내려가던 단테의 길을 닮아 있다.
*일베 사태: 2013년 4월 강영민이 기획한《박정희와 팝아트투어》가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를 모독했다고 일간베스트회원들이 공격한 사건으로 투어를 함께 떠난 팝아티스트 낸시랭이 종북좌파로 몰리는 등 논란이 됐다. 이 후 강영민과 낸시랭은《나의 일베전투기》라는 전국 순회 강연을 개최했다.
글: 이택광, 문화비평가,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