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el's Library
Antiphlamine, Mi Kim
1999/07/13 – 1999/07/15

바벨의 도서관

참여 작가: 안티푸라민, 김미
장소: 대안공간 루프
주최/주관: 대안공간 루프

Babel's Library

Artist: Antiphlamine, Mi Kim
Venue: Alternative Space LOOP
Organized by: Alternative Space LOOP

제1각형 삭개오, 지극히 모던하심/예술과 이성의 발란스를 말하다

태초에 이성의 논리로 세계를 전복시킨 자가 있었으니 그 자가 바로 플라톤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희랍사에서 시와 주술과 예술과 철학은 구분되어 있지 않았으나 플라톤 이후 모든 것은 로고스라는 말씀으로 재편성되었다. 이후 데카르트가 등장하고 니체의 시대가 있었으며, 해체주의자들의 득세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문화적 헤게모니의 출처가 불분명한 상대주의적이며 주관주의적인 또한번의 세기말의 서기력을 맞이하는 단계이다(이 명확한 시대인식이여/부디 선적인 사고의 산물임에/스스로 자중하시도록). 비디오 아티스트 삭개오가 홍대 지역에 등장하여 클럽 언더그라운드의 DJ로, 언더 밴드 ‘쇠파이프’의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전자첼리스트 김동섭과의 ‘환각 도서관’ 활동으로, 흑백 비디오 단편영화의 감독으로 동분서주하였을 때 그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은 것은 로고스의 위력이었다. 그의 감각은 해체 이후의 시대를 넘보는 위력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모더니즘의 후예로 각성하고 ‘언어에 대한 재능’ 이후에 나타난 것이 모니터와의 만남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아주 많은 말씀들을 품고 있다. 이 말씀들은 자신의 표현능력이 바로 ‘사유의 세월’에서 왔다고 하는 그 자신의 태도에 극명한 드러냄이 있다. 인조 장미꽃과 유리 심장을 가진 마네킹 옆에서 모니터 안의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한다. 그리고 묵약 하에 이루어진 그 인터뷰 속에서 삭개오는 90% 이상이 슬픔일 수밖에 없는 그의(/당신의) 삶과 관계와 섹스와 작업과 음악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의도적 배치 속에서 당신이 현대 미술이란 저런 것이다,라고 낮게 탄식할 때 삭개오는 사실 자신의 깨달음을 나누고자 하는 전도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당신의 탄식과 그의 깨달음의 불일치야말로 진정한 소통을 요구하는 계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의 말씀처럼 함께 나누고자 하는(그래서 사실 계몽의 의미는 부재한) 이 행위가 어느 토요일밤, 홍대 지역 잘알려지지 않은, 비약의 루핑을 도모하는 공간에서 벌어질 때 당신은 이미 스스로 카운셀러가 되어 모니터 앞에 서있게 되는 것이다(아멘, 이라고 외쳐도 좋다). 삭개오에게서 우리는 비주얼 아트라는 것이 개화되면서 동시에 획득한 그 한계점을 본다(우리는 지금 본다/그가 열심히 프로그래밍했고 편집했던 그 행위들을). 그리고 우리 모두 기뻐한다. 한계로 인해 무너진 균형을 새롭게 바로잡기 위해 또한번의 예술행위가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에 (그것이 또한번의 비밀스러운 자조적 탄식을 빌어올 ‘현대미술’이 될지라도). 근대적 이성의 우위에 의한 모더니즘이 아닌 매번 새로움을 찾아가는 모더니즘의 숭배자로서 삭개오는 오늘도 열심히 언더그라운드에서 사유의 테크노를 틀어제끼는 것이다.

제2각형 장승효, 리액션을 행위하심/대중과의 그 험난한 소통을 넘어서

광기가 위험한 통찰력으로 지적당한 시기 이후에는 (이를테면 16세기 초의 에라스무스에 의해), 광인이 개념적으로 세세하게 정의된 근대 사회 이후에 미셀 푸코가 등장하고, ‘저저… 노란 머리의 미친 놈들…’ (동네 아저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취급을 받는 비주류의 퍼포먼스 아티스트를 옹호하기 위해 장승효는 미셀 푸코를 재인용한다. 기하학적 추상주의를 통해 본질과 순수에 근접하려는 러시아의 절대주의자들에 대한 불쾌감을 감추지 않으면서 장승효가 내미는 것은 해프닝과 미니멀 아트이다. 사실 대한민국 미술교육의 아카데미즘 최전방에 서있는 장승효가 보여주는 다단계의 양상들은 상당한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국전과도 인연이 닿았던 그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활동하면서 엄숙한 졸업전(그 엄숙함은 미술사에 정통에 근거한 모든 반역은 허용하지만/예를들어 양아치로 ‘거정’하거나 키취의 기호를 드러내는 것/…허용한다. 그러나, 가장되지 않은 진짜 거리의 아트는 거부할 수밖에 없는 생리를 가지고 있다)에 보다 더 엄숙한 ‘진짜’기타 연주로 자신의 무대의 안과 밖에 대한 사고를 보여주었을 때로부터 지금 그는 한참을 멀리와있다. 어찌보면 그는 자신의 작업을 자신을 매혹시켰던 그 사고로부터 자유롭게 풀어놓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동시에 그는 다원화된 사회라는 것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정한 범주 안에서 모든 것을 미술사의 코드들과 연관시켜 설명해내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하다면 이 모든 자신 바깥의 복잡미묘형용불가능의 질료들로부터 액션에 대한 리액션으로 정리해내는 장승효의 진정한 욕구는 대체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기둥들 사이로…’ 지나갈 때 당신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눈을 반짝이는 은색의 메두사이다. 기둥을 칭칭 휘감은 호스 사이로 스파크 조명의 90개의 눈을 보며 당신은 과연 절대주의와 본질주의로 근접했던 자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개별적 사변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시대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챌 것인가(모든 것은 신의 뜻/그리고 당신 마음 내키는 대로). 크리스토의 작품을 피상적으로만 다가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버즈 아이 뷰가 아니기에)세상에 대한 리액션으로서의 작품들에서 본질은 당신의 마음에, 그 사사로운 마음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장승효의 유쾌한 디너쇼(메두사의 눈이 메인 코스임)에는 그 사사로움을 사려깊게 배려하는 리액션의 행위가 있을 뿐이고, 그것이야말로 대중과의 소통을 가능케하는 것이라는 그의 믿음이 함께한다. 아마 장승효는 당신에게 가장 매혹적인 작품일 것이다. 당신이 최전방의 아티스트에게 대중성을 재정의 하라고 했을 때 그만큼 시대에 발맞추어 당신의 대중성에 대한 편견을 유쾌하게 정의해줄
아티스트는 없기 때문이다.

제3각형 장진성,현장으로 흡수되심/에너자임이 낯설다 말하다

‘현존하는 모든 수작업의 대가’하고 적힌 명함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프로덕션 이름인 듯 싶은 ’져그’ 옆에 장진성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조각가 장진성에게 이 모든 수작업은 유머 이상의 실질적 생존방식을 의미한다. 그는 한떄 잘나가는 조각가였다고들 한다.(과거형이라는 것이 기쁘다고 이상주의자들이여, 함부로 말해주십시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삶의 원죄를 뒤집어쓰고 추락한 져그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 장진성은 스스로를 행위조각으로 재탄생시키고 존엄한 조각계의 작가주의로부터 벗어나 현장으로 들어가 현장 자체로 화하기를 바라는 퍼,폼,과 설,치,의 이중주를 매일매일 재연해내고 있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부딪히는 거짓과 사기와 오욕의 순간들에 장진성의 욕망은 알아가는 것에 있다. 판단하는 것에 있지않다. 그래서 그는 하기싫은 작업도 한다.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난다. 자기 자신이 아닌 것과도 그는 가까이 하고자 한다. 이 모든 관계가 장진성에게는 현장이고 작업이다. 하지만 장진성의 작업에서 당신이 제일 먼저 간파해내는 것은 진정성이다. 그의 현장을 기록한 비디오테잎들에서 당신은 기도하는 내면을 드러내는 그의 행위들을 본다. 겨울바다의 한 가운데서, 탄광촌의 어스름 속에서, 클럽의 음침하게 낯선 지하공간에서 =장진성의 행위들은 그 자신과 세계가 만나는 방식이 신적 호소력을 가진, 고전적 코드들로 이루어있음을 본다. 거기에는 자아가 있고,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있고, 십자가의 고뇌가 있다. 그는 이런 삼일치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그에게는 이질적인 비트닉의 요소가 있다. 그는 ‘길위에서’ 오히려 답답함을 느낀다. 사방으로 펼쳐진 무한확장의 공간 안에서 그는 길을 잃어왔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그 길을 발견하기 위한 행위조각을 한다. 거대한 철판이 철길위에 놓여지고 흑자는 햄머로, 흑자는 화염으로 길을 재발견하기 위한 구멍을 얻기 위해 철판에 온갖 흔적을 남긴다. 두들기고 불지른다. 장진성의 준비는 철판을 철길위에 놓은 순간 이미 완벽하게 끝난다. 그 다음부터는 현장의 장소성과 현장의 냄새에 몰입하여 주어진 조건에 반응하는 과정이 시작되고 이것이야말로 그에게는 작업이며, 그 순간 그는 진정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는 천사의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걸 대단한 기반으로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99%를 망각해도 몸은 살아있고 넘치는 에너지가 있음을 안다. 그러면서 그 내부의 넘치는 에너지가 낯설다고 토로한다. 당신의 그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다. 당신은 그에게서 때로는 주문제작 퍼,폼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그에게 작업은 당신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져그여, 부활의 날개는 이미 펼쳐져 있습니다.

24각형 김구루, 질서를 이루심/우연성의 형식을 점검하다

구루라는 이름의 통상적 의미에서 힌두이즘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 이름의 무게는 만만치않다.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성립되는 순간 이후라고 이해한다면, 김구루에게 그 작업의 의미는 중재자이며 전방위적인 시각으로 지시하는 자에 보다 가까울 것이다(작명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운명의 주재자다, 아마도 확실하게). 혹, 당신이 김구루에게서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를 엿본다면, 그는 유쾌하게 신지수를 세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름과 합일하는 그의 실제적 이미지들과 그 실제적 이미지들을 포괄하는 그의 작업 안에서 어느 누구도 급진적인 요소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기대하지 않는 것이다/모두들 알고자 하는 것만큼, 보고자 하는 것만큼 알고 본다). 그가 ‘아틀란티스를 찾아서’ 나섰던 대장정의 길 위에는 이전의 순례자들이 로드무비에서 보여주었던 방식대로 손짓 하나로 의미를 펼쳐가는 고행이 있다. 그는 성서로부터 동시대 작가들이 신체조각에 이르기까지 관통해왔던 세계와 자신에 대한 질서의식을 재현해내고자 하는 욕망의 작가이다. 사실 그가 조직해왔던 여러 연대들과 행위들과 전시들, 그의 문건들 속에서 우리는 결코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찾을수 없다. 모든 것은 기이하게 다시 배치되어 원래의 의미가 흔적들로만 남아있으면서도 공명을 요구하는 해석의 어려움을 발견하게 된다. 태양 아래 그 어떤 것도 일별의 단순한 제스추어로 해석해낼 수 없는 법, 당신의 그 안에 혼재된 상황을 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불가능한 법이며,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이치를 단순힌 표면의 아래로 파고 들어가려는 현자들의 태도이다. 그래서 김구루는 가치판단의 체계를 믿지 않는다. 그는 자기 안의 텍스트를 펼쳐보이는 과정 안에서도 스스로를 해체하는 갸륵함을 엿보인다. 그것이 그에게는 나눔의 형식인 것이다. 이번에 김구루는 분류하는 것에 대해 사고하기로 한다. 전시장 안의 새로운 분류표를 제안하는 서지학자로 등장하기로 한다.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이질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매체들과 사물들과 행위들이 매일 다른 방식으로 만나고 의외의 위치들을 점거함으로써 다른 의미를 획득하고자 한다(삶의 우연이 필연이 되는 것, 그리하여 삶은 그 의미를 갖는다/ ‘아르미안의 네딸들’이라는 서사극의 주제가 그러하듯이). 그 자신의 말대로 이것은 ‘시간과 메타포의 싸움’이 되어야 할 것이고, 설혹 그 싸움이 처음의 목적을 상실 한대도 상관없는 구도의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김구루가 그간의 작업과 지금의 작업과 앞으로의 작업에서 꾸준히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그 자신의 의연함이다. 구루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것을 선택한 자로서 그는 세계와 주체에 대한 태도를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만들어가는 자의 운명을 받아들인것이다.

제5각형 이유재, 시각을 얻으심/예술의 고전적 위치를 바라보다

만약 음유시인의 재질에 보헤미안적 기질을 가지고 있고, 신체의 주체하지 못하여 외부로 뻗쳐나가는 강렬한 파장에 유희로서의 삶의 한 면을 드러낸 자가 있다면 우리는 흔쾌히 그를 아티스트로 정의하는 맥락에 두고 싶어할 것이다. 사실 그는 그러한 통념적 정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진정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외부적 상황을 결정지었던 것이 실존의 험난한 하루하루였음에도 마치 그는 대속자처럼 내면의 규율을 지켜낼수 없는 업보를 지게 되는 것이다(그러한 것이 예술가들의 평전이 주로 지지하는 서술의 태도이다). 그러나 이유재가 택하는 방식은 직접적인 접근이다. 그의 작업은 확실히 전시장을 위한 것이며, 기록필름으로 남겨지기 위한 행위이며, 모여드는 군중들의 의아함을 정당화시켜주는 낯선 동작들이며, 관객을 개별적 타자로 두는 것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솔직함은 기본적 욕구로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이 예술가의 이미지를 고정시킨 것과 같으면서 다른 길을 가는, 평행선 위의 작업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예술의 착취자이며, 이용자라는 것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한다. 그는 사람들이 예술가에 대해 가져왔던 통념들, 예술이기를 바라는 것들에 대해 가져왔던 미적태도(-론자들이 이야기했던 바로 그). 인상주의 비평의 주관적 요소들(그래서 더없이 예술가들에게 유리했던) 등등을 포착한 자의 여유만만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과정 이후에 작품을 보존하지 않고 잊어버리고 폐기시키는 것을 택한다(지금은 박물관으로 가는 작품들을 의도하지 않는 작가들의 시대인 것이다). 그는 예술가라는 미명 하의 모든 행위를 이용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예술은 예술에 대한 신앙을 가진 자들의 몫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그는 예술가이며, 아니기도 한다). 이유재의 작업은 자신이 발딛고 있는 현재를 ‘예술적’ 이미지와 행위로 전이시키는, 그래서 현실과 유리된 또 하나의 지점으로 둔다(그는 예술의 속성이 현실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것을 안다). 그는 계층선호도 피라밋을 세운다. 자신이 속해있는 계층에 대해 과연 얼마만큼 선택의 의미가 들어있는가에 대해 그는 질문을 던지기로 한다. 그리고 전시 기간 동안의 이러한 실행력이 다른 실행성을 낳길 바라는 욕구를 전시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그가 화두로 삼고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 삶의 토대 위에 변칙적인 진행으로 이어지는 요소들이기 때문에, 그 변칙성이 어느 일관된 주제에 대한 변형이며 리믹스 작업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리드미컬한 진행을 통해 지나온 길과 앞으로의 길이 순간적으로 합치되는 순간을 기대하는 것이다. 사실 그는 착취자임을 가장하고 있는 예술지상론자인지도 모른다.

제6각형 손승렬, 소통을 구하심/감동에 정점을 찍다

인간이 깨어있을 때 보는 모든 것은 바로 죽음이다.라는 헤라클리투스의 잠언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살아있는 것이 힘을 얻는 것은 죽음의 전제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더이상 거대 담론이 이끌어온 방식대로 신이, 예술이, 과학이, 문학이, 역사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죽음을 선포해온 것이 지난 백년 동안 당신과 내가 줄기차게 해온 일이다. 이런 상징적 죽음을 선언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얻은 것은 잃었던 것을 되찾는 것에 있다기 보다는 새로운 체계에 대한 갈망이 공통 분모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피가 난무한는, 인간조건의 결정적 불충족을 원인으로 하는 죽음의 실체는 없다. 손승렬의 죽음에 대한 일련의 작업들이 보여주었던 것은 이 두 죽음이 새롭게 만나는 방식이었다. 20세기에 자살한 예술가들의 초상으로부터 시작했던 그의 작업도 이러한 사고에 기반한 것이다. 죽음이 주변에 널려있었던 환경으로부터 그는 어느 순간 죽음이 다른 차원의 의미로 변형 되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는 한때는 살아있었던 것들의 죽어있는 형체들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연장되는, 존재했음이라는 과거형이 갖는 의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손승렬의 작품들에 다가가는 가장 진솔한 통로는 아니다(전술한 모든 단어와 문장들이 엿같은 서술을 위한 서술이다.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고들 한다면, 그렇다면…). 이제야 고백하자면 그는 감동의 그 순수함을 추구하는 자이다. 거기에는 뭔가 천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원령공주>와 같은 요소도 있을 것이며, 거리나 학교에 동상으로 세워져 지나가는 자들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겸허해지고 때로는 뿌듯해하는 요소도 있는 것이다. 손승렬은 그 감동의 열쇠를 쥐고자 한다. 비록 그가 때로는 감동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더라도 영감님은 그를 부지불식간에 찾아오기도 하신다(심지어 술에 현혹당하는 순간에도 찾아오시는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신다). 이번에 손승렬이 영감님과의 조우로 진행하는 작업은 바로 소동파의 ‘적벽부’서체로 현재진행형 만남이다. 그는 삼겹살로 만들어낸 새로운 서체로 ‘적벽부’의 언어적 느낌을 시각적매체로 전이시키는 작업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삼겹살의 무게는 말라비틀어질때 비로소 가벼워진다(진정한 삼겹살의 죽음이 시작되는 때에야 비로소 무게로부터 벗어나느 것이다). 이성과 규칙으로부터 상상력과 열정을 도모하면서 예술을 천재의 작업으로 규정했던 낭만주의 시대에 대한 매혹으로, 손승렬은 현대미술이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낮게 탄식하는 무리에 속해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당신이 현대미술의 양상을 보지 않는다고 말못한다. (대부분의) 모든 작업은(탄식의 대상인 현대미술조차도) 소통과 감동을 위한 우리 삶의 양상 중의 하나임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당신이 이 공간 안에서 삼겹살로 쓰여진 ‘적벽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