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with a view: Kyung Ah Ham Solo Exhibition
Kyung Ah Ham
1999/05/24 – 1999/06/03

방안에 보이는 전경: 함경아 개인전

참여 작가: 함경아
장소: 대안공간 루프
주최/주관: 대안공간 루프

Room with a view: Kyung Ah Ham Solo Exhibition

Artist: Kyung Ah Ham
Venue: Alternative Space
Organized by: Alternative Space LOOP

Room with a vie

    1. xx – 작가와 첫 대면
      그녀는 지금 나에게 성냥개비를 이어 붙여서 grid 형태의 판들을 만들고 그것을 벽으로 삼아 공간을 만드는 자기 작업 얘기를 열심히도 설명하고 있다. 성냥개비라… 몇 백 개의 성냥을 실리콘으로 이어 붙여서 하나의 unit을 만든다니, 가공할 만한 인내와 노동이 요구될 듯 싶다. 그리고 그 하나의 완성된 unit는 grid가 되고…
      grid 그리고 좌표에 대한 상투적인 생각들-컴퓨터 시대가 제공하는 좌표화 된 사물의 위치, 공간의 기계화, 수치화, 그리고 숨 막힘 등등. 또 다시 나의 피해의식을 건드리는 구나 좌표여.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내가 좌표와 그래프에 대해 갖고 있던 강박관념이 나의 상상력에 가로세로 선들을 쫙쫙 그어댄다. 순간. X가 늘 Y라는 짝을 가지는, 외로움을 모르는, 그리고 복잡 미묘할 것도 없는 그 세계를 매우 동경하던 그 숨 막히는 수학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좌표의 세계를 ‘늘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나의 수학점수와 그 세계의 룰이 상실되었을 때의 수학점수의 황폐함이 복잡 미묘하게 잔상으로 그 선생님의 얼굴에 오버랩 되면서. 나의 grid에 대한 선입견이 이미 작가 작품을 내 머릿속에서 완성해 놓아 버렸다. 작가에게서 기대 해 본다-내가 그리드 공간의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1. xx – 작가와의 전화 통화 후.
      그녀는 아직도 성냥개비를 이어 붙이고 있단다. 몇 판 쯤 만들었을까. 그나저나 고민이다. 공간에 대한 작업이 그 공간 없이 진행될 소지가 있다. 이미 몇 번이나 Loop를 답사하고 돌아갔건만, 근의 작업이 이 공간과 부대끼는 시간이 충분치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흔히 ‘설치’라고 말해지는 작품들의 한계이자 모순은 공간을 염두하고 작가가 체험하는 시간의 턱없음에 있다. 즉, 결과적으로 공간은 작품을, 작품은 공간을 소외시켜 작품이 ‘설치’되는 그 의의를 상실케 한다. 많은 경우 이것은 작가의 책임만은 아니다. 설치전시라는 것이 대부분 피임기구를 사용하고 인공 수정 하는, 그래서 결국 칠삭둥이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관행에 휘둘려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함경아의 작품이 Loop라는 모태에서 품어지는 시간은 그녀의 작품에 있어 절대적이다. 아마 그녀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이리저리 설치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Loop에 옮겨오는 순간 그것은 전혀 다른 새로운 context를 가지게 된다. 작품이 놓이는 물리적 관계로서 새로운 자리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임, 그녀 작업실에서의 이전의 체험은 의미를 완전히 상실할 것이다. 이러한 공간과의 조응에 대한 관념은 함경아 작업의 본질적인 과정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추상적이어서 관객들에게는 사실 피부로 그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이긴 하다. 그렇다고 새장을 옮겨 놓듯이 전시를 할 수는 없는 문제다. 여기서 결과 그 자체는 사실 중요하지 않음으로.
    1. xx – 전시 2주전. 작업실 방문
      나는 지금 함경아의 작업실을 찾아가고 있다. 경찰서를 끼고 왼쪽 길로…가라…앗, 이런.. 박서보 미술관이 여기에…? 시커멓고 거대한 사각의 덩어리 건물의 중량감이 채 가시기 전에 도착한 함경아의 작업실. 그 문을 열자마자 성냥개비 그리드로 만들어낸 공간의 벽이 나와 마주서 있다. 방금 본 mass의 중량감 때문인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청량하다. 공간을 소소하기도, 섬세하고 제법 사소하면서도 정을 주고 싶은 느낌…적어도 안과 밖의 동시에 담고 있는 그리드 벽들을 통과하는 관객들에게 권위적인 공간이 되진 않을 듯하다. 제법 이러저러한 즐거움이 있으리라. 공간을 체험하는 상대적인 시간 속에서 각자에게 모두 다른 의미로 전도되겠지만 어쨌든 이러한 과정 자체가 상당히 명상적이다.
      영화 ‘카드로 만든 집’ 속에서 느꼈던 약간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떠올려 본다. 그 영화 속에서 아이는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서 카드로 집을 만든다. 카드로 만들어진 집은 자폐 증세를 갖고 있는 그 아이만의 세상이자 치유의 공간이다. 연약한 성냥개비 30000개를 붙여나가면서 자신만의 세계로 몰입하는 경험을 했을 작가에게도 역시 이 아슬아슬한 공간은 심연에 있다. 미술사적으로 그래왔듯이 사실 공간과 체험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은 관객친화적이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이 매우 관념적이고 현상학적인 입장-대상이 제시하는 세계와 만나고 체험하는-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관객친화적이지 않다.
      함경아의 작품을 말로 얘기하려니 참으로 관객에게 불친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눈으로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시간은 관객을 일방향적인 미술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함경아의 작품은 관객으로부터 완성된다.
      그녀는 작품과 씨름한 예술가의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수공업적 제작의 시간을 통해 그녀가 전통적인 예)술가의 위치를 확인해나갔을 그 모습이 수많은 성냥개비를 통해 확인되면서 사실 조금은 소름이 끼친다. 적어도 머리로만 작품 하는 자들, 그리고 쉽게 만들어 내거나 스스로 만들지 않는 자들이 지닌 예술에 대한 조롱이 무색해진다. 반드시 제작의 시간이 작품의 가치의 잣대일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이제 Loop에서 새롭게 만들어질 그 공간을 상상한다. 사람들은 그리드 벽을 다라 걷고, 여러 좌표 위에 자신의 신체 부분 부분들이 위치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또 다른 사람들의 점들을 눈으로 추적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은 늘 어떤 공간속에 길들여지던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가 다시 공간을 보듬어 확인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할 시간을 강요할 것이다. 강요당하는 게 싫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라. 여하튼 우리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어야만 하니까.
    1. 24 성냥개비로 만든 집으로 오세요
      성냥개비 집이라… 엄밀히 말하면 집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적어도 집을 지반위에 세워진 구조물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말이다. 그리고 구조물로서의 집이 제공하는 공간이 전제로 하는 폐쇄성과 견고함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어릴 적 읽은 돼지 삼형제의 집짓는 스토리가 문뜩 떠오른다. 삼형제가 각각 선택한 갈대, 통나무, 벽돌이라는 재료가 그들의 성실함과 인생을 사는 진지한 태도로 재단되는 스토리 구조를 지녔던 그 이야기의 관점에서 보면, 함경아의 작품은 첫째 돼지보다도 더욱 게으른 자의 사치스런 감상일 뿐이다. (아니 사실, 이 이야기의 영웅인 막내 돼지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예술은 게으르고, 인생의 가치관으로는 쓰잘 데 없는, 불성실의 극치이다.) 그러나, 역으로 함경아 그녀가 성냥개비 하나하나를 이어붙이는 데 공들인 시간의 가치는 예술이라는 것으로서 보상 받는다. 막내 돼지의 벽돌집-사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공간임에도 불구하고-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공간”과 몸을 부빌 기회를 함경아는 제공하고자 한다. 미술사적 맥락에서 보면, 사실 이러한 의도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우리에게 제공된 기회는 극히 적었고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어려워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일 수밖에 없어왔다. 이제 한 번의 기회가 다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요동치는 그 시간, 그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털끌 하나의 반응까지 다 털어 넣고 가거나 다시 다 주워 담아 가라. 작가에게 관객은 그의 작품을 완성하는 하나의 조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작품의 존폐는 관객의 손에 달렸다고 보면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화르륵’ 한줌의 재가 될 것만 같은 이 가냘프디 가냘픈 성냥개비가 제공하는 공간에 이미 초대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아보았습니다.
제게 주신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설명을 드리고자 이렇게 답장을 보내니 이 편지가 무사히 당신 손에 도착하길 바랍니다.

당신은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을 어디선가 보았거나 혹은 그에 대해 들어셨는가 봅니다. 약간은 격양된 어조로 ‘도대체 그 작은 성냥개비를 만리장성 잇듯 이어나가는 수공예적 발상으로 노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오셨습니다. 당신은 행여 관객을 놀래키려는 저급한 동기로 제가 이제껏 알량하게나마 지켜오던 작가적 자존심에 흠집을 낼까 걱정이 되셨나 봅니다.

사실 어떤 물질을 선택하느냐는 오늘은 오므라이스를 해 먹을 거니까 당근과 양파, 감자가 필요하고 기분에 따라 고기를 첨가하는 식의 명료한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일관성과 필연성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편입니다만 제게 있어서는 이 일관성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마치 마술사가 목구멍에서 줄줄이 손수건을 끄집어내듯이 때때로 제 안에 고여 있는 것을 밀어내야 하는, 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의 순간들을 맞이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저는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물체들을 한 없이 어루만지게 됩니다. 수 천 개의 일회용 반창고를 덧붙여 인간의 피부를, 삶은 파스타 국수를 빽빽하게 꽂아감으로 인간의 몸통을 만들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번 작업 역시 작은 물체(성냥개비)가 하나의 단위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구조 역시 섬세하며 세포의 확장이나 축소처럼 유기체적인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전시의 제목을 ‘room with a view’라고 정했습니다. 성냥개비로 만든 평판들이 하나씩 공간을 채워옵니다. 그 안에서 점점 벽들이 형성됩니다. 그 벽들은 ‘가로막음’과 동시에 ‘보여줌’을 남깁니다. 그러나… 그 것은 당신의 눈이 아닌 몸을 위한 장(field)입니다. 제가 만든 미로와 같은 구조에서 당신 몸의 접촉이 만들어내는 벽의 파동을, 낮은 구조속으로 구부려 들어감(옴)과 빠져나옴(감), 스며들어감을 경험하십시오. (당신은 지금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터의 정글짐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움직임, 멈춤, 가두어짐을, 또 새로운 공간과 부딪침으로 생성되는 미묘한 감각을 느껴보십시오. 그래서 만약 이 공간이 당신의 몸이, 그리고 몸을 감싸고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거울의 역할을 하게 된다면 저는 더할나위 없이 기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공간구조가 무엇을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까. 어쩌면 눈에 익은 듯 한 하나의 모퉁이, 구석들을 실마리로 당신은 현실세계의 무엇인가를 연상하거나 어떤 일화의 배경을 생각해 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구조물이 그와 같은 지시대상과의 관계를 끊어버릴 때 이것은 답답함, 죄임 등의 추상화된 감각이나 감정으로 남게 됩니다. 그런 성격이 시간의 흐름 뒤에 무엇이 서 있음을 아는데서 오는 초조와 불안을 닮아있고 그래서 삶의 어쩔 수 없는 형태를 그리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한 가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점은 이 작업을 하는 내내 제가 그리워했던 것은 한 없이 넓은 하늘과 바다, 대지가 이어진 무한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끝없이 미시적으로 파고 들수록 그 반대극점의 엄청난 자유로움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 전시장에서 당신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순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의 작업을 어떻게 보실 런지도 궁가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당신의 행동과 시간의 점유를 요구할지라도, 또 작업을 힐끗 보고 지나가는 관람방식에 항거할지라고, 소용없다는 것을 압니다. 요즈음에는 모든 것이 취향의 문제로 가볍게 환원되어버리니까요. 그렇다 해도 저의 작업이 당신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켰다면 다음번의 편지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에게 예술이라는 형태로 그리고 당신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소통하면 그럼, 즐거운 마음으로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오월의 끝 무렵에. 함경아

추신: 작업의 시작에서 완성까지의 과정이 하나의 선택에서 또 다른 선택에의 꼬리 잇기라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특히 이런 선택을 함에 있어 ‘자신들의 마음과 몸으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지능으로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생각으로 인하여…“ 라는 부분을 소리 내어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